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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 달력에 D-60이라고 쓴 날부터 이상해졌어요. 수학 문제를 읽는데 글자가 눈에만 들어오고 머리에는 안 남아요. 그 대신 수능 날 아침에 알람이 안 울리는 장면이나, 성적이 나오는 날 휴대전화를 여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요. 정신을 차려 보면 숨을 참고 있어서 '하' 하고 한꺼번에 몰아쉬어요."
수능을 두 달 앞둔 고3 여학생이 상담실 소파에 앉자마자 한 말입니다. 여름까지 치른 모의고사 성적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공부 시간은 오히려 한 시간쯤 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집 한 쪽을 넘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날마다 길어졌다고 합니다.
밤이 되면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해졌습니다. 수험장 교실과 1교시 시험지, 성적표를 받는 날의 저녁 식탁까지 장면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결과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은 밤에도 성적이 나오는 날 어머니 표정이 어떨지부터 떠올랐습니다.
이상한 점도 있었습니다. 막상 모의고사를 보는 날은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시험지를 받아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 학생을 괴롭힌 것은 시험 그 자체보다 시험을 기다리는 날들이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수능 결과를 기다리며 숨을 멈추는 반응을 따라가다, 어머니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장면을 함께 살폈습니다.
시험보다 기다리는 날이 더 힘든 이유
먼저 긴장이 커지는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달력의 숫자를 볼 때인가요, 담임 선생님이 남은 날을 말할 때인가요, 아니면 모의고사 일정이 공지될 때인가요? 날짜를 의식할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고 숨이 얕아진다면, 시험 자체보다 다가오는 일정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시험지를 받은 뒤 아는 문제도 떠오르지 않아 힘들다면 긴장이 나타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위험으로 받아들여 몸과 마음이 경계하는 상태를 예기불안이라고 합니다. 수능이 성적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면, 달력의 숫자나 모의고사 공지처럼 작은 단서만 보아도 긴장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아직 두 달이나 남았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숫자를 보는 순간 벌써 시험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가슴이 뛰어요."
몸이 긴장하면 수능 날과 성적표 장면이 머릿속에 자꾸 끼어듭니다. 한 번에 집중할 수 있는 생각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면 수학 풀이를 따라갈 여유가 줄어듭니다.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롤러코스터는 떨어지는 순간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열차가 덜컹거리며 꼭대기로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에도, 한 칸 오를 때마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갑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몸은 벌써 떨어질 때를 대비합니다. 수능까지 남은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날들이 이 학생에게는 그 오르막과 같았습니다.
달력을 뒤집어 놓아도
학생도 불안을 줄이려고 여러 방법을 써 봤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호흡 앱을 켜고 숨을 셌고, 공부 계획표는 삼십 분 단위로 더 촘촘하게 짰습니다. 숫자를 보지 않으려고 책상 앞 달력을 벽 쪽으로 뒤집어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실 칠판 구석에는 담임 선생님이 매일 고쳐 쓰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눈에 들어오면 다시 숨이 멎었습니다.
잠드는 시간을 일정하게 지키고, 실제 수능 시간표에 맞춰 문제를 풀어 보고, 긴장될 때 숨을 천천히 내쉬는 방법은 수능 준비에 도움이 됩니다. 잠을 거의 못 자는 날이 이어지거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불안이 크다면 병원 진료를 먼저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 학생처럼 날짜가 떠오르는 순간마다 같은 반응이 되풀이된다면, 그때 몸이 무엇에 반응하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숨부터 멎는 반응은 잘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무의식 자동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수능 날짜를 떠올릴 때 숨이 어떻게 멈추고 가슴이 어떻게 뛰는지부터 살폈습니다. 이어 그 몸의 느낌과 관련된 오래전 경험과 감정을 찾아갔습니다.
냉장고 문에 붙은 딸기 스티커
깊은 최면 상태에서 학생에게 책상 앞 달력의 숫자를 떠올려 보게 했습니다. 곧 숨이 가슴 위쪽에서 막혔고,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 느낌에 집중하던 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부엌이에요. 냉장고에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어요. 근데 이게 왜 나와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발뒤꿈치를 들어야 냉장고 손잡이에 손끝이 닿던 무렵입니다. 여자아이는 냉장고 문 아래쪽에 딸기와 별 모양 스티커를 빼곡하게 붙여 놓았습니다. 손잡이에도 딸기 하나를 붙인 뒤, 개수대에서 쌀을 씻는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눈 감고 와 봐!"
엄마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다가왔습니다. 냉장고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다 쓰고 남은 스티커 종이를 등 뒤에서 두 손으로 꼭 쥐고 엄마 얼굴만 올려다봤습니다. 숨을 들이마신 채 내쉬지 못했고, 차가운 부엌 바닥 위에서 발가락은 오므라들었습니다.
아이는 엄마 얼굴에 따라 저녁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웃으면 부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렀고, 얼굴이 굳는 날에는 물소리와 칼질 소리만 들릴 만큼 집 안이 조용했습니다. 오늘 저녁이 어느 쪽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손잡이에 붙은 딸기 스티커를 손톱으로 긁어 봤습니다. 스티커가 반쯤 찢긴 채 남았습니다. "이걸 언제 다…"라고 하던 엄마는 말을 맺지 않고, 밥을 먹게 손을 씻고 오라며 개수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 식탁은 조용했습니다. 아이는 밥을 먹는 내내 엄마 얼굴을 살폈습니다.
어른이 된 학생은 최면 속에서 그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앞의 어린 자신 옆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등 뒤로 모은 작은 두 손 위에 자기 손을 가만히 얹고 말을 건넸습니다.
"엄마가 뭐라고 할지 몰라서 숨도 못 쉬고 있구나. 엄마가 바로 웃지 않는다고 네 마음을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야. 엄마를 기쁘게 해 주려고 붙였구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도 숨은 쉬어도 돼."
지금의 학생에게 잠시 뒤 벌어질 일을 전해 들은 아이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마음에 둔 채 그날 저녁을 다시 겪어 보았습니다. 엄마는 전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고, 손잡이의 스티커를 긁다가 손을 씻고 오라며 돌아섰습니다. 그래도 ‘엄마가 바로 웃지 않아도 내 마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구나. 대답을 기다리며 숨까지 멈출 필요는 없구나’라고 알게 되자 숨은 편안하게 드나들었고, 오므렸던 발가락도 바닥 위에서 펴졌습니다. 조용한 식탁에서도 달걀말이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냉장고 앞의 아이는 엄마의 대답을, 달력 앞의 학생은 수능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엄마 얼굴만 살피며 숨을 멈췄듯, 학생도 수능을 두 달이나 앞두고 성적이 나오는 날의 식탁과 어머니 표정을 떠올리며 숨을 참았습니다. 수능 긴장이 어린 시절의 이 장면 하나에서 모두 비롯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상담에서는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숨을 멈추고 몸을 굳히는 반응을 다뤘습니다.
빗금을 긋고 불을 끄는 밤
달력의 숫자는 그 뒤로도 매일 하나씩 줄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숫자를 대하는 학생의 반응이었습니다. 벽 쪽으로 뒤집어 두었던 달력을 다시 걸고, 자기 전에 그날 날짜에 펜으로 빗금을 그은 뒤 불을 껐습니다. 누우면 수능 날 아침 장면이 한 번 스치기는 했지만,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칠판 구석의 숫자가 바뀐 아침에도 학생은 숫자를 한 번 보고 수학 문제집을 폈습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까지 숨을 몰아쉬지 않고 문제를 이어 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어머니가 수능이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얘기 하지 마"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질문이었습니다. 그날은 친구들과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답했고, 두 사람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어느 바다로 갈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성적표를 받는 날의 식탁을 미리 그리며 숨을 참던 학생이, 이제는 같은 식탁에서 수능이 끝난 뒤의 바다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달력의 숫자를 보자마자 숨부터 멈춘다면, 그 긴장이 준비가 모자라다는 신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알아도 결과를 기다리며 몸을 굳히는 반응은 먼저 일어납니다. 남은 날을 걱정만 하며 보내지 않으려면, 날짜를 볼 때 몸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