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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빼서 앉는 순간 한숨부터 나와요. 책은 아직 펴지도 않았는데 명치에 뭐가 얹힌 것처럼 꽉 막혀요. 엄마는 한숨 쉴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풀라고 하세요.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아니까 더 답답해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상담실에서 처음 꺼낸 말입니다. 밤 열 시에 학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그때마다 긴 숨이 새어 나왔고, 가슴 아래가 묵직하게 가라앉았습니다. 문제집 첫 장을 펴 놓고 샤프 끝으로 책상만 두드리다 보면 삼십 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고 합니다.
공부 스트레스를 검색하고 상담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학생 본인이었습니다. 성적이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에서 늘 상위권이었고 학원 숙제를 빠뜨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책상 앞에 앉기가 부쩍 싫어졌고, 자신이 게을러진 것 같아 밤마다 누워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주변에서 돌아오는 말은 비슷했습니다. 성적 때문에 힘들다고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다들 자기도 그렇다고 했고, 어른들은 고등학교에 가면 더 힘들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학생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한숨에는 눈에 띄는 점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보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는 순간 가장 크게 나왔습니다.
몸은 왜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지쳐 있었을까요?
칸을 다 채운 플래너에도 남던 한숨
학생도 그동안 여러 방법을 써 봤습니다. 플래너에 하루 할 일을 잘게 나눠 적었고, 휴대폰 타이머로 공부 시간과 쉬는 시간을 정해 두기도 했습니다. 할 일을 작게 나누고 쉬는 시간을 미리 정하면 공부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규칙적으로 자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플래너 칸을 다 채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한 칸을 끝내면 체크 표시를 하기도 전에 다음 칸이 눈에 들어왔고, 쉬는 오 분 동안에도 남은 쪽수를 셌습니다. “다 해도 다 한 것 같지가 않아요. 하나 끝나면 바로 다음 게 있으니까요.” 의자에 앉는 순간 나오는 한숨도 그대로였습니다.
공부 스트레스로 힘들다면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한숨이 언제 나오는지입니다. 문제를 풀다 막혀 나오는 한숨은 그 문제가 어렵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반면 책을 펴기도 전에 한숨이 나온다면, 책상에 앉는 일 자체가 부담의 신호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일을 마친 뒤 잠깐이라도 ‘다 했다’고 느끼는지, 곧바로 남은 일부터 떠오르는지입니다.
치과 의자에 앉기만 해도 굳는 손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응을 ‘조건화’로 설명합니다. 어떤 장소나 물건과 같은 느낌이 여러 번 함께하면, 나중에는 그 장소나 물건만 봐도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따져서 만드는 반응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치과 의자를 떠올려 보세요. 기구가 입에 닿기도 전에 의자가 뒤로 젖혀지는 순간 손잡이를 꽉 쥐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플지 생각하기도 전에 손에 힘이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학생에게는 책상 의자가 그랬습니다. 오늘 공부가 어려울지 쉬울지 따져 보기도 전에, 앉기만 하면 명치가 묵직해지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공부는 끝이 잘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문제집 한 권을 끝내면 다음 권이, 숙제를 끝내면 수행평가가 기다립니다. ‘다 했다’는 느낌 없이 곧바로 다음 일로 넘어가는 날이 쌓이면, 책상에 앉는 일만으로도 끝없는 공부 부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에 익은 반응은 ‘오늘은 한숨 쉬지 말자’고 다짐하기 전에 먼저 나타납니다.
그래서 최면상담에서는 마음을 다잡게 하기보다, 다짐보다 앞서 일어나는 몸의 반응을 살핍니다. 지금 몸에서 먼저 느껴지는 감각을 실마리로 삼아, 그 감각이 처음 익숙해진 무렵의 감정과 경험을 함께 찾아갑니다.
신문지 위의 콩나물 소쿠리
최면이 깊어지자 학생은 등받이에 몸을 맡긴 채 명치에 얹힌 묵직함에 주의를 모았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학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거실 바닥이에요. 신문지가 깔려 있고, 콩나물이 수북해요.”
책상도 문제집도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린이집에 낮잠 이불을 들고 다니던 무렵의 여자아이가 신문지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콩나물 꼬리를 떼어 소쿠리에 담으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작은 손가락으로 한 가닥씩 꼬리를 뗐습니다. 마지막 한 가닥까지 담은 아이가 소쿠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습니다. “엄마, 다 했어!”
가스레인지 앞에서 국을 젓던 엄마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다 했으면 이것도 해야지.” 잠시 뒤 엄마는 국자를 든 채 다가와 멸치 바구니를 신문지 위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가 멸치 배를 갈라 까만 내장을 다 빼고 다시 “다 했어”라고 하자, 이번에는 “그럼 신문지 접어서 치워야지”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신문지를 접는 아이의 손이 조금씩 느려졌습니다. 입에서는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아이가 들어 올렸던 소쿠리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채 식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더 이상 ‘다 했어’라고 말하지 않고, 다음 일을 기다리며 신문지 모서리만 만지작거렸습니다.
학생은 아이가 소쿠리를 들어 올리던 순간으로 돌아가 신문지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소쿠리를 함께 들여다보다 콩나물 한 가닥을 집어 들었습니다. “꼬리가 하나도 안 남았네.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엄마는 국을 젓느라 돌아보지 않았지만, 엄마가 소쿠리를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콩나물을 끝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멸치를 또 받더라도 콩나물은 이미 다 한 일이며, 하나를 마쳤을 때는 ‘다 했다’고 느끼고 잠시 쉬어도 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지금의 학생에게 그때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들은 아이는,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마음에 둔 채 그 저녁을 다시 겪어 보았습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았고, 멸치 바구니와 신문지를 치우라는 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엄마가 바로 봐 주지 않아도 내가 끝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알게 되자 소쿠리를 내려놓으며 스스로 ‘다 했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멸치 바구니가 놓여도 가슴 아래가 묵직해지지 않았고, 신문지를 접는 손도 느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낸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다음 일이 이어지는 경험이 쌓이면, 일을 마쳐도 쉬지 못하고 다음 일을 먼저 기다리게 될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의 한숨도 공부가 싫다는 뜻이라기보다, 의자에 앉는 순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 시작된다고 몸이 먼저 받아들인 반응에 가까웠습니다. 상담에서는 방금 끝낸 일을 제대로 끝났다고 느끼는 경험을 되찾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했어”
학원이 늦게 끝난 어느 목요일 밤, 학생은 여느 때처럼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뺐습니다. 이번에는 앉는 순간 한숨보다 문제집을 펴는 손이 먼저 움직였다고 합니다. 영어 단어 한 묶음을 외운 뒤에는 플래너 칸에 체크 표시를 하고, 의자에 기대 기지개를 한 번 켰습니다. 다음 칸은 그다음에 보았습니다.
열한 시 반, 그날 정한 분량을 마친 학생은 문제집을 덮었습니다. 방문을 열고 거실을 향해 “오늘은 여기까지 했어” 하고 말한 뒤 불을 끄고 누웠습니다. 할 일을 다 해 놓고도 불을 끄지 못한 채 다음 날 분량을 당겨 풀던 밤과는 달랐습니다. 그날 책상 위에는 덮인 문제집과 샤프 한 자루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밤에도 의자에 앉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면, 게으름 때문이라기보다 반복되어 몸에 밴 반응일 수 있습니다. 계획표를 새로 짜고 공부 시간을 줄여도 앉는 순간 가슴이 먼저 무거워진다면, 책상 앞에서 저절로 시작되는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끝낸 일을 끝났다고 느낄 수 있어야 다음 일을 시작할 힘도 생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