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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남편이 식탁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였어요.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명치가 확 뜨거워지고 관자놀이가 조여 왔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이미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요.
아이가 저를 쳐다보던 눈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마흔을 갓 넘긴 여성분이 상담 첫날 꺼낸 이야기입니다. 회사에서는 목소리를 한 번도 높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만 들어오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짜증이 났던 일들을 적어 보면 서로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컵 소리, 세탁기 알림음, 아이가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는 것, 신발장 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 어느 하나 크게 화낼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날 때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기 성격을 의심합니다. 그분도 그랬습니다. 원래 예민하게 태어났나 보다, 나이가 들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습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잠을 충분히 자면 짜증이 덜 나는 날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몸이 힘들면 같은 소리도 더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리는 분명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잘 자고 잘 쉰 날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습니다. 그분은 짜증이 나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짜증이 향하는 곳은 여전히 같았습니다. 집이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분도 그 점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린 날보다 오히려 아무 일 없이 지나간 날 저녁에 더 크게 터진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는 왜 집에 와서야 터졌을까
그날 컵 소리가 정말 원인이었다면, 소리가 멈춘 뒤에는 마음도 가라앉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컵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그분은 한참을 식탁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일을 전치라고 부릅니다. 화가 났던 곳에서 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 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 남고, 그렇게 남은 감정이 원래 대상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대신 향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쓰는 오래된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탄산음료 병을 한참 흔든 뒤를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병을 흔드는 동안 안에는 압력이 쌓이지만, 뚜껑이 닫혀 있는 동안에는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뚜껑을 여는 순간 탄산이 한꺼번에 넘쳐 나옵니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뚜껑을 연 사람이 그 압력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전부터 병 안에 쌓여 있던 압력이 그 순간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집에서 터지는 짜증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컵을 내려놓은 일이 그 화를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표현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감정이 그 순간 가까운 사람에게 터져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짜증이 난 일이 끝난 뒤에도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소리가 멈추고 상황이 정리되었는데도 안에 남은 감정이 그대로라면, 그 일은 원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그 일 때문이었다면 그 일이 끝날 때 감정도 함께 가라앉습니다. 반대로 상황이 끝난 뒤 오히려 더 답답해진다면, 이미 안에 쌓여 있던 것이 그 일을 계기로 올라온 쪽에 가깝습니다.
그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 늘 웃으며 없다고 대답해 왔는데, 그 대답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고요.
고마운 사람에게는 화낼 수 없었다
그분에게 회사에서 힘든 일이 정말 없었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별일 없다고 했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자 팀장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팀장은 그분의 집안 사정을 이해해 주고 여러모로 챙겨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팀장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년쯤 전부터 다른 사람 몫의 일이 하나둘 그분에게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이 계속되면서 업무 부담도 점점 커졌습니다.
힘들고 불만도 생겼지만, 정작 팀장에게 화가 난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나를 이렇게 챙겨 준 사람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편한 일이 생겨도 팀장에게 이야기하기보다 그냥 넘겼습니다. 화가 나도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감정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에서는 참고 지나간 감정이 남아 있다가, 집에 돌아와 컵 소리나 아이의 행동처럼 작은 일을 계기로 가까운 사람에게 터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앞으로는 화내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는 것만으로는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미 쌓여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왜 정작 화가 났던 사람에게는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지금 반복되는 짜증과 연결된 감정과 경험을 따라가며, 이런 반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분에게 짜증이 올라올 때 속으로 자주 하는 말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한 뒤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나만 참으면 되지.”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상태에서 그 말과 함께 떠오르는 감정을 따라가자,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골목의 세발자전거와 울던 동생
세 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골목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옆집 문이 열리더니 한 어른이 나와 시끄럽다며 큰소리를 냈습니다. 아이는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화가 나고 무서웠지만 그 어른에게 따지거나 화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로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마루에 앉아 있는데 어린 동생이 다가와 팔을 잡고 흔들며 장난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동생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부엌에 있던 어른이 나와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세 살 아이가 조금 전 골목에서 얼마나 놀라고 화가 났는지, 왜 그 화가 지금 동생에게 터졌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지금의 문제와 닮아 있었습니다. 골목에서는 자신보다 무섭게 느껴지는 어른에게 화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자신보다 편하고 안전한 동생이 다가오자, 조금 전까지 참고 있던 화가 그쪽으로 터졌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비슷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자신을 챙겨 준 팀장에게 불만이 있어도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컵을 내려놓는 소리나 아이의 사소한 행동에 훨씬 큰 짜증이 터졌습니다.
최면 상태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마루에 앉아 있던 어린 자신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지금 화가 난 것은 동생 때문이 아니라고, 조금 전 골목에서 큰소리를 들었을 때 무섭고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고요.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화가 난 사람과 화를 받은 사람이 달랐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옆집 어른에게 표현하지 못한 화가 동생에게 터졌고, 어른이 된 뒤에는 팀장에게 표현하지 못한 불만과 화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짜증의 대상은 계속 달라졌지만 반응 방식은 늘 같았다는 점입니다. 대상이 바뀌어도 같은 반응이 반복된다면, 그 반응을 만든 원인을 매번 대상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에 화가 났는지보다 어디서 화가 나오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같은 소리인데 그날은 달랐다
저녁에 설거지를 하는데 아이가 옆에서 냄비 뚜껑을 계속 여닫았습니다. 소리는 그대로 들렸습니다. 그분은 하던 설거지를 마치고 물을 잠근 뒤, 뚜껑을 제자리에 놓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소리는 다른 이야기를 할 때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 회의에서는 자신에게 넘어온 일이 언제까지 필요한지 처음으로 물었습니다. 팀장은 일정을 다시 잡아 보겠다고 답했습니다.
언제부터 달라졌는지는 본인도 딱 집어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뚜껑 소리가 계속 나는데도 아무 일이 없었던 그 저녁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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