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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취소한 날 저녁, 마음이 놓였던 적이 있으신가요.
대부분은 그날 유난히 피곤했거나 몸 상태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깁니다.
그런데 이런 홀가분함이 여러 번 되풀이된다면, 단순한 피곤함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약속을 잡을 때는 괜찮아요. 그런데 그날이 다가오면 아침부터 속이 뒤집힙니다.
옷을 갈아입다가 손끝이 차가워지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면 숨이 짧아져요.
결국 못 가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도로 눕는데, 그 순간이 하루 중에 제일 좋습니다.
그게 벌써 몇 번짼지 세지도 못하겠어요."
삼십 대 초반 여성분이 첫 상담에서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집에서 온라인 매장에 올릴 상품 사진과 설명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몇 해 전 매장 일을 그만두고 이 일로 옮길 때만 해도 조건이 좋아서 일을 옮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밖에 나갈 일이 줄면서 약속도 줄었고, 어쩌다 약속이 잡혀도 대부분 당일에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동창 모임은 삼 년째 나가지 않았고, 청첩장을 받고도 답을 미룬 것이 두 번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정말로 마음이 놓였습니다.
취소 뒤에는 홀가분함이 남았습니다
무언가를 피한 직후 불안이 줄어들면, 그 행동은 반복되기 쉬워집니다. 이를 부적 강화라고 합니다. 말은 어렵지만 뜻은 간단합니다. 어떤 행동을 했더니 불편함이 사라졌고, 그 결과 다음에도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취소 문자를 보낼 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아침부터 조여 오던 불편함이 문자를 보내자마자 풀립니다. 몸은 무엇이 힘들었고, 무엇을 했을 때 그 불편함이 사라졌는지를 빠르게 익힙니다.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취소할 때마다 같은 안도감이 되풀이되면, 사람을 만나는 상황 자체를 점점 더 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다음 약속은 잡는 것부터 망설이게 됩니다.
피하는 약속이 하나씩 늘었습니다
발목을 접질린 뒤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아픈 쪽을 디디면 아프니까 반대쪽 다리로만 걷게 됩니다. 그렇게 걸으면 당장은 덜 아픕니다. 그런데 아껴 둔 쪽은 쓰지 않는 동안 힘이 빠져, 나중에는 제대로 딛는 일 자체가 더 어려워집니다.
사람을 피하는 일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도 처음에는 큰 모임만 피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피했고, 나중에는 둘이 만나는 것까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이렇게 피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은 더 부담스러워집니다. 나중에는 사람 앞에 서는 것 자체가 두려운 대인공포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자기 상태를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약속을 취소한 뒤 삼십 분 동안 어떤 감정이 먼저 드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미안함이나 아쉬움이 먼저 든다면 그날 사정 때문에 취소한 경우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안도가 먼저 느껴지고, 그 안도 때문에 다음 약속까지 미루게 된다면 대인기피증이 아닌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진료를 받아 보는 분도 있습니다. 긴장을 낮추는 약은 사람을 앞두고 심장이 뛰거나 손이 떨리는 정도를 줄여 약속한 곳까지 나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을 조금씩 만나며 익숙해지는 연습이나, 생각을 점검해 보는 상담으로 한결 나아지시는 분도 많습니다.
다만 그분처럼 사람 만나는 일을 오래 피해 온 경우에는 어려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약속을 잡았을 때와 약속 당일의 결정이 달라집니다. 잡을 때는 나가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날이 되면 이유를 찾기도 전에 손이 먼저 취소 버튼을 누릅니다.
그렇다면 이 반복은 어디에서 끊어야 할까요. 약속에 나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의식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약속 당일 아침에는 그 결심보다 먼저 피하려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다룹니다.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 느끼는 감정과 신체 반응에 집중하면서, 같은 반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느꼈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여름 낮의 놀이터가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면 손끝부터 차가워진다고 했습니다.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뒤 그 서늘한 감각에 집중하자, 여름 낮의 놀이터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아직 말이 다 트이지 않은 아이가 미끄럼틀 옆에 서 있습니다. 몇 발짝 앞에서는 또래 아이들이 모래밭에 둘러앉아 무언가를 쌓고 있습니다. 아이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옆에 쭈그려 앉습니다.
그중 제일 큰 아이가 고개를 들고 말합니다. "끼지 마."
아이는 내밀던 손을 거두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있던 보호자 쪽으로 돌아갑니다. 보호자 발치에 앉아 혼자 모래를 만지작거리는데, 조금 전까지 뛰던 가슴이 가라앉습니다.
그 큰 아이가 누구였는지, 아는 아이였는지는 장면 안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분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놀이터에서 그런 말 한 번 안 들어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중요하게 남은 것은 그 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섰을 때 마음이 놓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다가가면 밀려나고, 물러나면 마음이 놓인다는 경험을 아이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겪었습니다.
대인기피증으로 오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피하는 쪽을 택할 때마다 실제로 마음이 놓였다면, 피하는 행동은 그분에게 매번 불편함을 줄여 준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다음에도 같은 선택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분은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 보호자 발치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파던 모래를 함께 파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손을 멈추고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모래를 담았습니다. 그러다 자기가 담은 모래 한 줌을 어른 쪽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분은 그 손을 받아 든 뒤에야 장면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번에는 날짜를 먼저 말했습니다
요즘 그분은 매장에서 함께 일했던 옛 동료와 다시 연락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일을 그만둔 뒤 몇 해 동안 서로 소식이 끊겼던 사이였습니다. 생일이 지난 것을 알고, 늦었지만 축하한다고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답장이 오면서 그대로 통화가 이어졌고,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통화 끝에 다음 주 토요일에 보자고 먼저 날짜를 말한 쪽도 그분이었습니다.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도 손끝이 서늘한 것은 여전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취소 문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취소한 뒤 마음이 놓이는 것은 게을러서도, 사람이 싫어서도 아닙니다.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몸이 이미 익혔고, 그 방법이 매번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반복할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점점 더 부담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취소 문자를 보내셨다면, 그 직후 어떤 감정이 먼저 들었는지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안도가 언제부터 몸에 익었는지 살펴보고, 그때의 경험과 감정을 함께 다룹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