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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가 넘으면 저도 모르게 부엌으로 갑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한번 시작하면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멈추질 못합니다.
배가 딱딱해지고 숨이 차서 더는 안 들어갈 때가 되어야 손이 멈춰요.
그러고 나면 불 끄고 누워서 제가 저를 못 봐 주겠습니다."
삼십 대 중반 여성분이 상담 신청서에 적어 온 이야기입니다. 병원 접수 창구에서 일하는 분이었고, 낮에는 끼니를 거를 만큼 정신없이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우려 하면 어김없이 부엌 쪽으로 발이 향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자기 상태가 섭식장애의 하나인 폭식증에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검색해 보면 나오는 조언은 대개 비슷했습니다. 저녁을 거르지 말 것, 먹을 것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지 말 것, 물을 먼저 마셔 볼 것. 모두 해 봤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며칠은 잘 버티다가도 회사에서 싫은 소리를 들은 날 밤이면 번번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배고픔이 찾아오는 순서가 이상했습니다. 정말 배가 고파서 먹기 시작한 날은 오히려 드물었습니다. 부엌으로 가기 직전에는 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밤에 고팠던 것은 정말 배였을까요.
자신의 폭식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몸의 배고픔은 천천히 찾아오고, 무엇을 먹어도 어느 정도 가라앉습니다. 반면 마음이 고픈 경우에는 갑자기 먹고 싶어지고, 배가 부른 뒤에도 멈추기 어렵습니다.
의학적인 구분은 아닙니다. 다만 며칠 동안 먹기 시작하기 십 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면, 자신의 폭식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배가 부른데도 손이 멈추지 않는 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어떤 느낌과 행동이 여러 번 짝을 이루면, 나중에는 그 느낌만 올라와도 행동이 먼저 나오는 식으로 학습됩니다. 마음이 허전할 때 무언가를 먹고 그 허전함이 잠시 가라앉는 일이 오래 반복되면, 허전함과 먹는 행동이 하나로 묶입니다. 그다음부터는 허전한 느낌이 올라오는 순간 배가 부른지와 상관없이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
추운 방에서 손난로 하나에 의지해 밤을 보내 본 사람이라면 이 느낌을 알 것입니다. 손난로는 쥐고 있는 동안 손끝을 녹여 줍니다. 하지만 방이 추운 원인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손난로가 식으면 또 새것을 찾게 되고, 몸은 추울 때마다 손난로부터 찾는 데 익숙해집니다. 밤마다 부엌으로 향하는 반응도 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겹칩니다. 낮에 굳게 참을수록 밤의 반동은 커집니다. 낮 동안 억누르고 버틴 것이 한 번 무너지면 더 크게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날일 수록 그날 밤이 오히려 더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치우고 참아도 다시 부엌으로 향할 때
음식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거나 저녁을 거르지 않는 방법은 도움이 됩니다. 음식에 손이 가기까지 시간이 늘어나고, 그 사이에 한 번 더 생각할 여유가 생깁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 분도 있습니다. 약은 올라온 충동의 세기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되고, 함께 겪는 우울과 불안에도 쓰입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느껴진다면 진료를 먼저 받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먹기 전후의 상황과 그때의 생각을 함께 정리해 나가는 상담도 어떤 흐름에서 무너지는지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런 방법들은 주로 폭식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나 시작된 뒤를 다룹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곧장 부엌으로 향하도록 익힌 반응 자체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래서 며칠 잘 지내다가도 힘든 밤이 오면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만으로 이 반응을 멈추기 어려운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엌으로 향하는 행동은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다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이미 시작됩니다. 그래서 먹은 양이나 행동만 살펴서는 왜 폭식이 시작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먹는 행동만 붙들지 않고, 폭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올라오는 감정과 몸의 느낌부터 함께 살핍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음식으로 달래는 일이 처음 시작된 무렵의 경험까지 이어서 다룹니다.
최면 속에서 떠오른 조용한 오후
그분에게도 먼저 그 느낌을 물었습니다. 폭식이 시작되기 몇 분 전이면 가슴 한가운데가 아래로 훅 꺼지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배고픔과는 다른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본인은 원인이 있다면 크게 상처받은 사건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최면이 깊어진 뒤 그 느낌을 다시 따라가자, 생각지도 못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장면은 어릴 적 살던 집이었습니다. 아직 묻는 말에 대답하기보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나이의 아이가 거실 한쪽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어른들도 집에 있었지만 저마다 바빴습니다. 아이가 다가가면 잠깐 눈을 맞추고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이는 일어나 부엌 쪽으로 갔습니다. 낮은 선반에는 과자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고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 동안에는 가슴이 꺼지는 느낌이 잠깐 가라앉았습니다. 집이 다시 조용해지면 아이의 손은 또 과자통으로 향했습니다.
어른들이 그 오후를 따로 기억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자기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던 아이에게는 다른 것이 남았습니다. 혼자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 그 과자통 안에 있다는 경험이었습니다.
폭식이 오래된 분들은 대개 자기 의지가 유난히 약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아이에게 과자를 먹는 방법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허전할 때마다 과자를 먹으면 그 느낌이 잠시 가라앉았으니, 몸은 이것을 가장 믿을 만한 방법으로 익혔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든 밤이면 어른이 된 뒤에도 그 방법부터 나오게 됩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분은 다시 그 오후로 들어갔습니다. 아이 곁에 앉아 아무 잘못도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먼저 알려 주었습니다. 어른들이 바쁜 것은 아이를 잊어서가 아니며, 저녁이 되면 다시 아이에게 돌아올 것이라고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꺼지는 그 느낌은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 뒤 같은 오후를 처음부터 다시 지나갔습니다. 어른들은 여전히 바빴고 집은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일어나 과자통 앞으로 가서 하나를 꺼내 먹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삼킨 뒤였습니다. 가슴이 아래로 꺼지는 느낌이 다시 올라오지 않았고, 조용한 집 안도 아까처럼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어른들이 무슨 일로 그렇게 분주했는지는 장면 안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분도 그 부분은 묻지 않았습니다.
야근을 마치고 언니에게 건 전화
요즘도 회사에서 싫은 소리를 듣는 날은 있습니다. 얼마 전 늦게까지 남아 일을 마치고 나온 밤에도 그랬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다가 그분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 좀 속상했다고, 그 말을 하려고 걸었다고 했습니다.
통화를 끊고 집에 들어와서는 부엌 불을 켰다가 그냥 껐습니다. 씻고 누운 뒤 그대로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말에는 오래 미뤄 두었던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고 온 날 저녁이면 유독 허전해서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르곤 했습니다. 그날은 버스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폭식은 배가 고파서 생기는 일만은 아닙니다. 마음이 허전할 때 그것을 달래는 방법이 오래전부터 음식 하나로 굳어지면, 밤마다 몸은 배고픔이 아니라 마음의 신호를 따라 움직입니다. 오늘 밤에도 부엌 불을 켜게 된다면, 부엌으로 가기 십 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만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 분 안에 있었던 감정이 그 밤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하필 부엌으로 이어지게 된 데에는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는 오래된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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