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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탁이 치워지고 나면 화장실 문이 잠깁니다. 조금 뒤 문이 열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나와 설거지를 시작합니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나고 있고, 그 몇 분을 눈치챈 사람은 없습니다.
"이걸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쓰리고 손끝이 떨려요.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회사에 가서는 멀쩡한 얼굴로 앉아 있고요. 그만해야 한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저녁만 되면 또 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처음 소리 내어 말하기까지 몇 해가 걸렸다고 했습니다. 삼십 대 초반의 직장인 여성이었습니다.
이분을 가장 심하게 나무라는 사람은 언제나 본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저녁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왜 또 이러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먹고 토하는 습관을 검색창에 넣어 본 적도 있습니다. 다만 끝까지 읽지 못하고 창을 닫았고, 그러고 나서 검색 기록부터 지웠다고 합니다.
이 습관이 이미 혼자만의 비밀이 되었는지는 이렇게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미리 거절하는 약속이 늘었는지 보시면 됩니다. 방을 같이 써야 하는 여행이나 워크숍, 밥을 먹고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모임을 이유를 붙여 피하고 있다면, 그 행동이 이미 생활의 범위를 줄이고 있는 것입니다.
커튼을 치면 방은 깔끔해 보입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큰데 왜 저녁마다 같은 일이 반복될까요.
많이 먹은 뒤에 올라오는 감정은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또 이랬다는 부끄러움이 함께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토하고 나면 그 순간 확실하게 가라앉습니다.
손님이 오기 전 어질러진 방을 커튼으로 가리면 당장은 깔끔해 보여 마음이 놓입니다. 하지만 커튼 뒤가 그대로인 채 가릴 것이 쌓일수록, 다시 커튼을 걷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먹고 토하는 습관도 비슷하게 굳습니다. 그 행동은 밀려온 부끄러움을 그때그때 치워 주고, 치워진다는 것을 몸이 배우고 나면 다음 부끄러움이 올라올 때 같은 방법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할 수 없으니 더 자주 쓰게 됩니다.
다짐이 저녁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
먼저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먹고 토하는 일이 오래 반복되면 몸에 무리가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루기 전에 병원에서 몸 상태를 확인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은 그 확인을 대신하는 글이 아닙니다.
이분도 내과에 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진료실에서는 속이 자주 안 좋다는 말만 하고 나왔습니다. 왜 속이 안 좋아졌는지는 끝내 꺼내지 못했습니다.
섭식 문제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나 상담을 함께 받는 분도 많습니다. 진료와 상담은 충동이 올라올 때의 세기를 낮추고, 혼자 감당하던 것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도움을 받으며 지내는 동안 반복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혼자 해 본 것도 많았습니다. 달력에 표시를 하고, 오늘은 하지 않겠다고 아침마다 다짐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소용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굳게 먹은 주에는 며칠씩 그냥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다만 아침의 다짐은 부끄러움이 올라오기 전에 하는 것입니다. 정작 그 감정이 밀려온 저녁에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겪은 어려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녁마다 되풀이되는 흐름에 본인이 결정을 내리는 대목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많이 먹고, 부끄러움이 올라오고, 화장실 문을 잠그기까지가 한 덩어리로 이어집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자동으로 부르는 방식이라 의식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바로 이 자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다룹니다. 지금 부끄러움이 올라올 때의 감정과 몸의 느낌에서 출발해, 같은 감정이 처음 만들어지던 무렵의 경험까지 함께 살펴봅니다.
소파 뒤에서 나온 안경
깊은 최면에 들어간 뒤, 화장실로 향하기 직전에 몸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느껴지는지 물었습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고 했습니다. 그 느낌에 그대로 머무르자, 지금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옛날 장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집 안 거실입니다. 아직 혼자 옷을 입지 못하던 무렵의 아이가 소파에 앉아 어른의 안경을 써 보고 있습니다. 손에서 미끄러진 안경이 바닥에 떨어지고, 접히는 다리 한쪽이 부러집니다.
아이는 부러진 안경을 주워 듭니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소파 등받이와 벽 사이 좁은 틈으로 밀어 넣습니다. 밀어 넣고 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다시 바닥에 앉아 하던 놀이를 계속합니다.
저녁에 어른이 안경을 찾습니다. 온 집을 뒤지다가 소파를 앞으로 밀어냅니다. 부러진 안경이 나옵니다. 왜 여기다 넣어 놨느냐는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됩니다. 상 앞에 앉아 있던 식구들이 모두 아이 쪽을 봅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얼굴이 뜨거워진 채 그대로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부러진 안경과 지금의 습관은 겉으로 닮은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날 이후의 대처 방식입니다. 무언가 잘못됐다 싶으면 먼저 감추고 혼자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감춘 것이 드러날 때 얼굴이 달아오르는 반응입니다.
이 습관이 오래 남아 있는 것은 그만두기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방법이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추고 나면 부끄러움이 그때마다 확실하게 가라앉았으니, 몸은 그 방법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같은 장면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어른이 된 그분이 아이 옆에 서 있었습니다. 안경을 틈으로 밀어 넣는 손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밀어 넣는 동안 혼자 두지 않고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짧게 말해 주었습니다. 안경이 부러진 것은 실수일 뿐이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지금은 무섭겠지만 어른이 아이를 미워해서 혼내는 것은 아니며, 잘못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 일도 곧 지나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다음은 그날 있었던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어른은 소파를 밀어냈고, 부러진 안경이 나왔고, 같은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됐고, 식구들은 모두 아이 쪽을 보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아이 쪽이었습니다. 얼굴은 전처럼 달아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른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아이는 어른이 자신을 미워해서 혼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잘못했다고 느끼면 들키기 전에 감추고 혼자 처리하려 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최면 중 이어서 다뤘습니다. 실수나 어려움을 알린다고 사람으로서 미움받는 것은 아니며, 감추는 대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해를 함께 넓혔습니다.
진료실에서 처음 꺼낸 말
상담 뒤 이분은 저녁을 먹고 곧장 화장실로 가지 않고, 식탁에 남아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일어났다고 전했습니다.
미뤄 둔 내과 진료도 다시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속이 안 좋다는 말에서 멈추지 않고, 그동안 반복해 온 행동까지 의료진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막상 첫말을 꺼낸 뒤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먹고 토하는 습관이 혼자만의 비밀이 되는 것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유난히 커서가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그때그때 치우는 방법을 몸이 먼저 배웠고, 그 방법이 매번 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반복은 다짐을 더 단단히 하는 것만으로는 잘 끊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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