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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기억을 잊으려고 애썼는데 오히려 더 자주 떠오른 적이 있나요?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 장면을 계속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글은 그런 어려움을 겪던 분의 상담 사례입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갑자기 그날 새벽이 눈앞에 펼쳐져요. 현관 쪽에서 나던 소리하고
신발장 앞에 서 있던 그 사람 뒷모습이요. 그 순간 뒷목이 서늘해지고 팔에 소름이 쫙 돋습니다.
숨은 얕아지고 손에 힘이 빠져서 접시를 놓칠 뻔한 적도 있어요.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초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마흔 초반 여성분이 상담을 신청하며 하신 이야기입니다.
몇 해 전 새벽, 인기척에 깨어 거실로 나가 보니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낯선 사람이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곧 뛰어나갔고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경찰이 다녀갔고 며칠 뒤 그 일은 마무리됐습니다.
일은 끝났지만 그 몇 초는 계속 떠올랐습니다. 도어락을 바꾸고 창문에 잠금장치도 달았는데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이나 친정어머니에게도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말하는 순간 그 새벽이 되살아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떠오르면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흔들고, 텔레비전을 켜고,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우려고 애쓴 날일수록 그 장면이 하루에 여러 차례 더 떠올랐습니다.
지우려면 그것이 떠올랐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생각을 억지로 막으려 하면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있나?’ 하고 확인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피는 동안 오히려 그 장면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를 ‘사고 억제의 역설’이라고 합니다. 어떤 생각을 억누르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 생각을 더 자주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피하려면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피하려고 애쓰는 동안 오히려 하루 종일 그 사람에게 신경을 쓰게 되는 셈입니다. 잊으려는 기억도 이렇게 계속 확인할수록 더 자주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분도 그랬습니다. 오늘은 절대 떠올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날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몇 번씩 그 새벽이 눈앞에 왔습니다.
그 몇 초 동안 몸이 크게 놀랐기 때문에, 그 장면이 떠오르면 심장이 뛰고 몸이 긴장하는 반응도 함께 따라옵니다. 그러면 사람은 더 불편해져서 그 기억을 빨리 밀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억지로 떨쳐내려고 할수록 몸은 더 긴장하고, 그 긴장 때문에 그 장면이 더 위험하고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그 기억을 밀어내게 되고, 같은 반응이 반복됩니다.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먹은 날에 더 자주 왔다면
그렇다고 그동안 해 온 방법이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쁘게 지내는 것은 힘든 하루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도 지나치게 올라간 긴장을 낮추고 잠을 자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뒤 잠들기 어려워 진료를 받는 분들에게는 이런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기억을 지우려 하기보다, 떠오를 때 어떤 감정과 몸의 반응이 시작되는지 살펴봅니다. 무서운 장면을 곧바로 밀어내려는 모습과 관련된 경험이 떠오르면 당시의 감정도 함께 다룹니다.
최면 속에 떠오른 어느 저녁의 골목
이분과의 상담도 그 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장면이 오기 직전이면 뒷목부터 서늘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최면이 깊어지자 그 서늘함이 다시 올라왔고,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자 새벽 거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저녁이 떠올랐습니다.
말을 막 배워 짧은 문장을 겨우 만들던 무렵이었습니다. 어른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길, 골목 한쪽에 크게 다친 개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른은 아이 눈을 손으로 가리고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아이는 손가락 사이로 이미 다 보았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합니다. 어른은 말을 자릅니다. 그런 건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요.
며칠 뒤 아이가 또 그 얘기를 꺼내자, 어른은 벽에 붙어 있던 강아지 사진을 떼어 내고 아이가 안고 자던 인형을 장롱 위로 올려 둡니다. 이제 그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날부터 아이는 밤마다 눈을 꽉 감았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애를 쓸수록 골목의 그 장면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아이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고, 무서운 것이 떠오르면 눈을 감고 밀어내는 일만 남았습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눈을 꽉 감은 어린 자신 곁에 섰습니다. 아이는 무서운 장면이 떠오르는 것조차 잘못된 일처럼 느끼며 생각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먼저 아이가 무서워하는 마음을 알아주었습니다.
“그런 걸 봤으니 무서울 수 있어. 네가 잘못해서 자꾸 떠오르는 게 아니야. 생각이 난다고 그 일이 지금 다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눈을 꼭 감고 밀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이 기억도 떠올랐다가 지나갈 거야.”
그 말을 전한 뒤 같은 저녁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어른은 똑같이 사진을 떼고 인형을 장롱 위에 올렸습니다. 아이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면이 떠오른다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을 꽉 감고 밀어내지 않은 채 그 기억이 지나가도록 두었다고 합니다. 상담에서는 무서운 장면이 떠오르면 잘못된 일처럼 여기고 곧바로 밀어내려 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최면 중 함께 살폈습니다.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 그 일이 지금 다시 벌어지는 것은 다르며, 억지로 없애려 애쓰지 않아도 지나가게 둘 수 있다는 이해를 이어 갔습니다.
이제 기억이 떠올라도 하던 일을 이어 갈 수 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설거지를 끝까지 한 저녁
상담 뒤 이분은 설거지 중 그날 장면이 떠올라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예전처럼 손을 닦고 텔레비전을 켜는 대신 그릇을 마저 씻고, 행주를 넌 뒤 불을 끄고 나왔습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캠핑도 다녀왔습니다. 그날 새벽 이후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내는 일을 미뤄 왔지만, 이번에는 텐트 안에서 아이들 사이에 누워 잠들었습니다.
힘든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흔들거나 다른 생각으로 덮고 있다면, 그 순간 무엇이 가장 무서운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기억 때문에 일상이 계속 힘들다면 혼자 잊으려 애쓰기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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