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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동그라미가 없는 날을 찾는 게 더 빠릅니다. 예전에는 큰일 한번 치르고 나면 하루 이틀 아프고 말았어요.
요즘은 아무 일도 없는 날에도 오후만 되면 이마 위쪽이 무겁게 지끈거려서 커튼을 치고 눕습니다.
작년에 검사는 다 받았고 이상 없다고 했는데, 아픈 날만 자꾸 늘어납니다."
회계사무소에서 십오 년째 일해 온 사십 대 중반 여성분이 만성 두통으로 상담을 신청하며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한 것은 삼 년쯤 전이라고 합니다. 진통제를 먹은 날에 표시해 두면 병원에서 설명하기 편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표시를 시작한 첫 달에는 동그라미가 네 개였습니다. 지난달 달력에는 열여덟 개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아무리 되짚어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일은 예전과 비슷하고, 베개도 그대로이며, 커피는 오히려 줄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예민해서 그렇다고들 했습니다. 그 말이 제일 답답했다고 합니다. 정작 본인이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러다 달력이 전부 동그라미로 채워지는 달이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두통은 먼저 의학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벼락 치듯 순식간에 심해지거나, 열과 구토가 함께 오거나, 몸 한쪽에 힘이 빠지고 말이 꼬인다면 진료가 먼저입니다. 머리를 다친 뒤에 시작된 두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이미 진료와 검사를 받았고 특별한 소견이 없다는 말을 들었으며, 긴장과 함께 비슷한 두통이 되풀이되는 경우입니다.
왜 예전보다 작은 일에도 머리가 아플까
긴장할 때 몸이 먼저 반응하는 데에는 뇌 안쪽의 편도체가 관여합니다. 편도체는 주변이 안전한지 빠르게 살피는 데 관여하며, 조심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몸은 곧바로 긴장합니다. 이때 이마와 두피, 목 주변 근육에도 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두 번이라면 상황이 지나가면서 그 긴장도 함께 풀립니다.
그런데 이 사례처럼 긴장과 통증이 오래 반복되면, 몸은 통증이 시작될 듯한 작은 신호에도 미리 긴장하기 쉬워집니다. 아직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굳고, 그 긴장이 다시 통증을 키우는 흐름이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현관문을 떠올려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처음에는 어깨로 밀어야 겨우 열리던 문도 여러 번 여닫고 나면 훨씬 작은 힘으로 열립니다. 문이 더 세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데 필요한 힘이 줄어든 것입니다. 두통도 이 사례처럼 처음에는 큰 스트레스 뒤에만 왔다가, 나중에는 훨씬 작은 신호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픈 날이 늘었다면 통증이 반드시 더 세졌다고 보기보다, 통증이 시작되기 쉬운 상태가 되었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두통이 시작되던 계기가 예전과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밤을 새우거나 큰일을 치른 뒤에만 왔는데 요즘은 전화벨 소리나 회의 시작 전에도 온다면, 통증의 강도뿐 아니라 시작되기 전 몸의 반응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두통의 종류를 의학적으로 가를 수는 없지만, 진료를 받은 뒤 반복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약을 먹어도 그대로 남는 순서
진통제는 이미 시작된 통증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줍니다. 아픈 채로 하루를 버티는 것과 통증을 낮추고 남은 일을 마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다만 진통제를 먹는 날이 늘고 있다면 진료 중인 의료진과 상의해 복용 방법을 점검하는 편이 좋습니다. 약을 먹어 통증이 내려가더라도, 별일 없는 날 작은 신호에 몸이 먼저 굳는 순서는 그대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서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오늘은 힘을 빼고 지내자고 마음먹어도 막상 비슷한 상황이 오면 몸이 먼저 굳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판단하고 선택하기 전에 일어나는 무의식의 자동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바로 그 순서를 살핍니다. 머리가 아파 오기 직전에 올라오는 몸의 느낌을 따라가며, 비슷한 반응이 익숙해진 오래된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함께 다룹니다.
신발을 맞추고 발소리를 듣던 저녁
그분은 머리가 아파 오기 직전이면 정수리 부근이 먼저 뻐근해지고 숨이 얕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상담은 그 두 감각에서 시작했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정수리의 뻐근함과 얕아진 숨을 따라가자, 생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저녁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말이 조금씩 트이던 무렵의 집 안입니다. 어른들의 목소리가 낮게 오가는 저녁이면 아이는 하던 놀이를 멈춥니다. 방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구석으로 밀어 놓고, 현관에 벗어 둔 신발을 짝 맞춰 세워 둡니다. 텔레비전 소리도 손이 닿는 만큼 줄여 놓습니다.
다 해 놓은 뒤에도 아이는 방문 가까이에 앉아 있습니다. 어른의 발소리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들으려고 숨을 얕게 쉽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이마와 정수리 근처에는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저녁이 조용히 지나가면, 아이는 자기가 미리 치워 둔 덕분이라고 여깁니다.
그 집 어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장면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분도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의 반응과 이 장면을 잇는 것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낌새를 먼저 살피고, 내가 미리 챙겨야 조용히 지나갈 것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의 목소리와 발소리를 살피며 집 안을 정돈했고, 어른이 된 뒤에는 결산이 몰리는 주에 부장이 의자에서 일어나거나 전화벨이 평소보다 길게 울리는 작은 변화에도 몸이 먼저 굳었습니다. 그때마다 정수리와 이마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얕아지는 반응도 닮아 있었습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방문 가까이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짧게 알려 주었습니다. 저녁이 조용해지는지, 어른들이 어떤 기분인지까지 네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발을 맞추고 소리를 줄인다고 해서 네가 모든 일을 막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같은 저녁을 다시 지나갔습니다. 어른들의 낮은 목소리도, 발소리도 그대로였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신발을 짝 맞춰 놓고 방문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저녁을 조용히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을 자기 몫으로 붙잡지 않자 숨이 조금 깊어졌고, 이마와 정수리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습니다. 발소리가 가까워져도 어깨가 먼저 솟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이가 신발을 맞추고 소리를 줄이는 일은 불안한 저녁을 견디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 뒤 조용히 지나간 저녁이 반복되면, 아이는 내가 미리 챙겨야 일이 커지지 않는다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문제는 그 집을 떠난 뒤에도 같은 방식이 남는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부장이 일어서거나 전화벨이 길게 울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먼저 상황을 살피고 긴장했습니다.
목요일 칸에 새로 적힌 두 글자
요즘 그분의 달력에는 동그라미 말고 다른 글씨가 생겼습니다. 목요일 칸마다 '모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네 도서관에서 저녁에 하는 독서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저녁 약속을 잡아 두었다가 머리가 아파 취소하는 일이 되풀이되자, 아예 약속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는 결산이 밀린 주였는데도 목요일 저녁에 책을 들고 나갔습니다. 돌아와 가방을 열어 보니 아침에 넣어 둔 진통제가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달력은 지금도 그분 책상 옆에 걸려 있습니다. 다만 펜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리는 날이 줄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변화는 두통을 억지로 참는 힘이 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산이 몰리고 작은 신호가 이어지는 날에도 몸이 예전처럼 먼저 굳지 않으면서, 두통 때문에 미뤄 두었던 저녁 약속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긴장과 함께 두통이 오래 반복됐다면 아픈 날의 개수만 세기보다, 통증이 오기 직전 몸에서 무엇이 먼저 시작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큰일 뒤에만 아팠는데 이제 작은 신호에도 머리가 아프다면, 통증 자체와 함께 그 전부터 되풀이되는 긴장 반응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