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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옮긴 회사 유리문 앞에 서면 입이 바싹 마르고 손끝이 차가워집니다.
문을 밀기 전에 한 번 숨을 고르고 들어가요. 전화 한 통 받고 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속이 메슥거려서 점심도 반은 남깁니다. 다들 곧 익숙해진다는데, 저는 자꾸 뒤로 가는 것 같습니다."
건설자재 회사에서 십 년 넘게 경리로 일하다가 규모가 더 큰 회사의 총무팀으로 옮긴 서른다섯 여성분이 상담 첫날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이직한 지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일이 좀처럼 손에 붙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회사 근처로 이사도 했습니다. 이삿짐은 진작 다 풀었지만, 저녁이면 거실 불을 켜 둔 채 소파에 앉아 낮에 자신이 했던 말을 하나씩 되짚어 봤다고 합니다. 예전 회사에서는 결산 때문에 밤을 새울 때도 이러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처음에는 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꺼낼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만 유독 적응이 늦는 것 같아, 일이 서툰 게 아니라 자신이 못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검색창에 ‘적응장애’를 넣어 본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적응장애는 증상 몇 가지만 보고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변화 뒤 불안이나 우울, 수면·식욕의 변화가 두드러지거나 출근과 집안일 같은 일상이 눈에 띄게 무너지고 있다면 전문기관에서 상태를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이 그 변화 이전부터 이어져 온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변화나 사건이 있었는지, 그 뒤 정서와 행동이 언제부터 달라졌는지,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 전문가가 판단합니다.
스스로 흐름을 가늠해 볼 간단한 방법도 있습니다. 최근에 크게 달라진 일을 하나 적고 그 옆에 날짜를 써 보십시오. 아침마다 속이 불편해지거나 잠이 얕아진 시기가 그 변화 뒤와 맞물린다면, 지금의 어려움이 단순히 일의 양뿐 아니라 변화 자체와도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볼 단서가 됩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손잡이를 찾는 손
왜 몸이 이렇게 먼저 반응할까요. 이해하는 데는 ‘조건화’라는 개념이 도움이 됩니다. 원래 별 의미가 없던 신호가 불편한 경험과 여러 번 함께 나타나면, 나중에는 그 신호만으로도 몸이 먼저 대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버스에서 몇 번 크게 휘청여 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출발할 때 손이 먼저 손잡이 쪽으로 갑니다. 아직 흔들리지 않았는데도 몸은 벌써 붙잡을 곳을 찾습니다. 버스가 움직이는 신호와 휘청였던 경험이 반복해서 이어진 뒤 생긴 반응입니다.
이직이나 이사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와 긴장이 자주 함께 있었던 사람은 ‘무언가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이 먼저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새 회사의 유리문과 낯선 전화, 새로운 사람들, 이사한 집이 모두 그런 변화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몸이 하루 종일 긴장한 채 지내면 사소한 일도 오래 남습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붙들고 다시 생각하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회의를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에 쓸 힘이 줄고, 작은 실수도 더 크게 느껴져 다음 날 아침부터 다시 긴장하기 쉽습니다.
곧 익숙해진다는 말
시간이 해결해 주는 변화도 분명 있습니다. 새 환경에 놓이면 누구나 한동안 긴장할 수 있고, 일과 사람이 익숙해지면서 그 긴장도 함께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도 많은 경우 맞습니다.
잠이 얕아지거나 불안이 심하면 상태에 따라 의료기관에서 약물치료를 병행하기도 하고, 상담을 통해 지금 놓인 상황을 정리하면서 대처 방법을 다듬기도 합니다. 이런 도움은 현재의 불편을 낮추고 새 환경에 적응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분처럼 시간이 지나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도 아침마다 유리문 앞에서 몸이 먼저 굳는다면, 현재 환경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변화라는 신호 앞에서 몸이 언제부터 비슷한 방식으로 반응해 왔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더 열심히 적응해 보자고 마음먹기 쉽습니다. 하지만 유리문 앞에서 손끝이 차가워지고 배가 굳는 것은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상황을 차분히 따져 보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여러 번 설득해도 같은 반응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지금 몸에서 먼저 올라오는 감각을 실마리로 삼아, 비슷한 반응이 익숙해진 오래된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함께 살펴봅니다.
저녁마다 순서가 달라지던 집
이분의 상담도 몸에서 먼저 올라오는 느낌을 살피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지기 직전이면 배 위쪽이 딱딱하게 뭉치는 느낌이 먼저 온다고 하셨습니다. 최면이 깊어진 뒤 그 감각에 집중하자, 회사가 아니라 오래전 집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말이 이제 막 트일 무렵의 아이가 욕실 문 앞에 수건을 안고 서 있습니다. 안방에서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른은 아기를 안은 채 방과 부엌을 오갑니다.
예전에는 씻고 나면 이불을 펴고 불을 끄는 순서가 비슷했는데, 요즘은 저녁마다 달라집니다. 어떤 날은 목욕할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고, 어떤 날은 그대로 잠자리에 듭니다. 아이는 수건을 꼭 쥔 채 어른이 움직이는 쪽을 따라갑니다. 어른이 방으로 들어가면 문턱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봅니다.
어른이 아이를 밀어낸 것은 아닙니다. 갓난아기를 돌보느라 하루의 순서가 자주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어린아이에게는 오늘 저녁이 어떻게 흘러갈지 계속 어른을 살펴야 했습니다. 그런 날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새 회사에서 전화 한 통을 받고 나서 자기 말을 되짚던 모습과, 저녁 순서가 달라질 때마다 어른을 따라다니며 다음을 확인하던 아이의 모습은 닮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달라지면 몸부터 긴장하고,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계속 살피는 반응이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그분은 수건을 안고 서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오늘은 씻지 않고 그냥 자게 될 수도 있지만, 순서가 바뀌었다고 해서 너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어른이 아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너를 두고 가는 뜻이 아니며, 다음 일을 계속 확인하고 있어야만 안전한 것도 아니라고 짧게 전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날 저녁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어른은 그날처럼 아기를 안고 방과 부엌을 오갔고, 아이도 수건을 든 채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번에는 문턱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배에 힘을 꽉 주거나 숨을 참지 않았습니다. 저녁 순서가 달라졌을 뿐, 곧바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이해가 함께 있었습니다.
유리문을 그냥 미는 아침
상담 뒤에는 아침에 회사 유리문 앞에서 따로 멈추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 컴퓨터를 켜면서 옆자리 동료에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지난달에는 부서에서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묵은 서류 정리를 자신이 해 보겠다고 먼저 말했다고 합니다. 십 년을 다닌 예전 회사에서도 먼저 손을 든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녁 시간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불을 켜 둔 채 소파에 앉아 그날 자신이 한 말을 하나씩 되짚었지만, 요즘은 다음 날 챙길 것 하나 정도만 떠올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이사 온 집의 거실 불도 이제는 일찍 끈다고 하셨습니다.
이직과 이사가 힘든 데에는 새 일이 어렵고 새 동네가 낯선 현실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기에 변화가 시작될 때마다 몸이 먼저 긴장하고 다음을 계속 확인하는 오래된 반응이 겹치면, 적응하는 과정이 훨씬 버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문 앞에서 한참 숨을 고르고 계신다면 더 단단히 버티는 것만이 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변화와 함께, 그 순간 몸이 어떤 순서로 반응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