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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서 신발을 벗으면 그때부터 입이 안 떨어집니다.
남편이 오늘 어땠냐고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하는 건 아는데, 말을 만드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냥 소파에 앉아서 한 시간을 그러고 있습니다."
"제가 웃는 게 일이거든요. 여덟 시간을 웃고 나오면 퇴근길 지하철에서 광대 옆이 얼얼합니다. 그런데 집에 오면 그 얼얼한 것보다 말하기가 더 싫어요. 애가 말을 걸어도 손짓으로 대답합니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십이 년째 일하는 서른아홉 살 여성분이 상담 첫날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매장에서는 손님에게 화를 내 본 적이 없고, 직원들 사이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통합니다. 이 글은 감정노동을 줄이는 요령을 소개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왜 말 한마디 꺼낼 힘까지 남지 않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처음에는 체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정노동이라는 말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자기 이야기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영양제를 바꾸고, 주말에는 약속도 잡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 그래도 월요일 저녁이면 다시 똑같았습니다. 서비스직은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같은 매장에서 같은 시간을 일하는 옆 직원은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손님이 많았던 날보다 참은 날이 더 힘들다
그날의 피로가 단순히 일의 양 때문이었는지 가늠해 볼 방법이 있습니다. 최근 유난히 기운이 없었던 저녁을 서너 번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손님이 몰려 종일 서 있던 날보다 무례한 말을 듣고도 웃으며 넘긴 날이 더 힘들었다면, 업무량 외에 감정을 누르고 표정을 유지하는 데 쓴 힘도 컸을 수 있습니다.
이분도 그랬습니다. 세일 기간이라 손님이 가장 많았던 주에는 오히려 집에 와서 밥을 차려 먹었습니다. 반대로 환불을 요구하며 언성을 높인 손님을 끝까지 웃으며 응대한 날에는 하루에 만난 손님이 셋뿐이었는데도, 집에 와서 불도 켜지 않은 채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웃는 동안에는 잘 느끼지 못한 긴장
심리학에서는 올라온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누르는 것을 정서 억제라고 합니다. 감정노동이 많은 일에서는 속으로 느끼는 것과 달라도 업무에 맞는 표정과 말투를 유지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나도 그 감정을 들여다볼 틈 없이 다음 손님을 맞고, 다시 웃으며 응대합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바쁘게 움직일 때는 어깨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일을 마치고 가방을 내려놓고서야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감정을 눌러 두고 필요한 표정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비슷합니다. 일하는 중에는 느끼지 못했던 긴장이 퇴근한 뒤 더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장에서는 괜찮았는데 집에 들어선 뒤 갑자기 말하기가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하는 동안 뒤로 미뤄 두었던 불편함과 긴장을, 표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느끼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에서는 지쳐 가는 상태를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정식 진단명은 아니지만, 감정노동이 많은 일을 오래 해 온 사람들이 자기 상태를 설명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잘 쉬어도 다음 주 저녁이 다시 힘든 이유
주말에 충분히 자고 쉬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됩니다. 쌓인 피로와 긴장을 덜어 내는 데 필요합니다. 피로가 오래 이어지거나 일상에 영향을 줄 정도라면 병원에서 몸의 원인이 없는지 먼저 확인하고, 정서적으로 버거운 상태가 계속된다면 상담의 도움을 받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고 나서도 매주 같은 저녁이 돌아온다면 다른 부분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매장 문이 열리고 불편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내 감정을 느끼기 전에 손님에게 필요한 표정부터 만드는 순서가 그대로라면, 월요일에도 같은 소진이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덜 참아야지 마음먹어도 손님 앞에서는 입꼬리가 먼저 올라갑니다. 오래 반복해 익숙해진 반응은 생각하고 선택하기 전에 먼저 나오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손님 앞에서 표정을 만들 때 몸의 어디가 함께 굳는지부터 보고, 그 반응과 이어진 오래된 경험과 감정을 다룹니다.
사진관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
이분의 상담도 그 지점에서 시작했습니다. 손님을 맞을 때 어디가 먼저 굳느냐고 묻자, 입꼬리보다 배 위쪽이 먼저 단단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 느낌에 머물자 오래전 사진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가족사진을 찍으러 간 사진관에서 아이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조명이 밝고 낯선 냄새가 나는 방에서 같은 자세로 몇 번이나 다시 찍는 중입니다. 아이는 지쳐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에는 물기가 맺힙니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손을 흔들며 웃어 보라고 합니다. 옆에 선 어른도 사진 찍을 때만 웃자고, 금방 끝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아이의 볼 옆을 가볍게 밀어 올려 입꼬리를 만들어 줍니다. 아이는 촬영이 끝나기만 기다리며 웃는 얼굴을 유지합니다.
웃고 있다고 해서 속까지 편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리는 뻣뻣했고 배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촬영이 끝난 뒤 사진관을 나와 어른의 손을 잡고 걸을 때도 아이는 말이 없었습니다. 곁의 어른들은 사진이 잘 나왔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의 매장과 오래전 사진관은 전혀 다른 곳이지만, 불편해도 상대가 원하는 표정을 먼저 만들고 몸에 힘을 준 채 끝나기를 기다리는 순서는 닮아 있었습니다.
최면이 깊어진 상태에서 그분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힘들고 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사진을 위해 잠깐 웃는 것과 속마음까지 괜찮은 척하는 것은 다른 일이고, 촬영이 끝나면 그 표정을 계속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습니다.
그 뒤 같은 사진관 일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사진사는 여전히 웃어 보라고 했고, 옆의 어른도 같은 말을 하며 아이의 볼을 가볍게 올렸습니다. 아이는 전처럼 사진을 위해 웃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다만 속까지 괜찮아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배에 들어간 힘이 덜했고 숨도 조금 편해졌습니다. 사진관을 나오는 길에도 말은 없었지만, 입꼬리와 어깨에 계속 힘을 주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담을 마친 뒤에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없는 자리에서도 표정을 먼저 맞추는 습관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서 먼저 꺼낸 이야기
이후에는 퇴근해 옷을 갈아입고 바로 부엌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녁을 차리면서 그날 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꺼낸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반품을 두고 실랑이가 있었던 손님 이야기를 했더니, 딸이 “그 사람 진짜 이상하다”고 맞장구를 쳐 둘이 함께 웃었다고 하셨습니다.
몇 해 전에 책만 사 두고 덮어 두었던 자격증 공부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아홉 시에 식탁을 치우고 책을 펴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 시간에는 불을 끄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감정노동으로 지치는 데에는 업무량과 근무환경, 수면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참은 날’ 집에 와서 말할 힘조차 남지 않는다면, 하루가 얼마나 바빴는지만 볼 일은 아닙니다.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한 순간에 내 감정을 뒤로 미루고 상대에게 필요한 표정부터 만들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많이 했는지와 함께 어떤 순간에 가장 많이 참고 버텼는지도 떠올려 보는 것이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