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다리 한가운데서 그냥 멈춰 섰습니다. 딸이 앞서 뛰어가는데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무릎 아래가 제 다리가 아닌 것 같고, 발바닥은 저릿하고, 손바닥에 땀이 나서 난간이 미끄러웠어요.
결국 딸만 아내랑 건너가고 저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왔습니다."
가구 공장에서 십삼 년째 일하는 마흔두 살 남성분이 상담 첫날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봄나들이로 강가에 갔을 때 물 위에 놓인 보행자 다리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다리 중간쯤에서 바닥 격자 사이로 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걸음이 멈췄다고 합니다.
그분이 더 답답했던 건 스스로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 소리가 크게 나도, 손을 다쳐 꿰맬 때도 태연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만 가면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소공포증이라는 이름을 알고도 답답함은 남았습니다. 어떤 높은 곳에서는 괜찮은데 다른 곳에서는 왜 다리부터 굳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높이인데 어떤 곳은 괜찮았습니다
그분은 십삼 년 동안 공장 이층 난간 옆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다녔습니다. 사무실이 있는 삼층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창고 사다리에서는 두 칸을 넘어가지 못했고, 높은 선반에 물건을 올려야 할 때면 늘 다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분은 높이보다 발밑의 느낌에 더 민감했습니다. 유리창으로 막힌 곳에서는 괜찮았지만, 바닥이 비치거나 몸을 의지할 곳이 없으면 다리가 굳었습니다. 이처럼 괜찮은 곳과 힘든 곳을 비교하면 무엇이 두려움을 일으키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높이와 상관없이 평지에서도 어지럽거나 가만히 서 있을 때 균형이 흔들린다면, 고소공포증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병원에서 원인을 먼저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 글은 높은 곳의 특정 조건에서 유독 몸이 굳는 경우를 다룹니다.
아래를 피해서 봐도 다시 멈추는 이유
그분도 나름의 방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선을 발끝 앞에만 두고 걷기, 난간에서 먼 쪽으로 붙기, 건너기 전에 숨을 길게 몇 번 내쉬기였습니다. 이런 방법은 그 순간의 불안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씩 높은 곳에 익숙해지는 연습도 도움이 되고, 불안이 심하다면 의료진과 상의해 약물치료를 함께 고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발밑으로 물이 보이거나 몸을 의지할 곳이 없으면 다시 다리가 굳었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붙잡을 곳부터 찾았습니다. 상담에서는 이런 상황과 몸의 긴장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몸은 ‘발밑이 사라지는 느낌’을 먼저 기억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조건화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던 감각이나 상황도 강한 공포와 함께 겪거나 여러 번 연결되면, 나중에는 비슷한 신호만 나타나도 몸이 먼저 긴장할 수 있습니다.
치과 대기실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도, 아직 진료 의자에 앉지 않았는데 턱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몸은 벌써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분도 발밑이 불안하게 느껴지면 종아리가 단단해지고, 붙잡을 곳을 찾으며 숨을 얕게 쉬었습니다. 다리가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도 몸은 이미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는 다리에 들어간 힘이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때 몸에서 먼저 올라오는 느낌을 실마리로 삼습니다. 높은 곳에서 어떤 감정과 몸의 반응이 시작되는지 살펴보고, 비슷한 반응이 언제부터 익숙했는지 그 무렵의 경험과 함께 다룹니다.
최면 속 거실에서 다시 만난 순간
그분과의 상담도 다리가 굳기 직전의 감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종아리 뒤쪽부터 단단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 느낌을 따라가자 오래전 거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어른의 한쪽 팔에 안겨 다니던 시절입니다. 아이가 거실 마룻바닥에 서 있자 보호자가 웃으며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립니다. 생각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집니다.
아이는 보호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습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지고, 내려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른에게는 아이를 웃기려던 잠깐의 장난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을 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에게는 발밑이 갑자기 사라지고,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장난을 겪었다고 모두 고소공포증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상담에서는 두 발이 허공에 뜨자 다리를 굳히고 보호자를 꽉 붙잡았던 아이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지금 높은 곳에서 보이는 반응과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갑자기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지금은 보호자의 손에 붙들려 있고 곧 두 발이 다시 바닥에 닿는다는 것도 짧게 전했습니다. 발밑이 비었다고 해서 몸을 끝까지 굳힌 채 버틸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런 다음 같은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보호자는 전과 같이 웃으며 아이를 들어 올렸고, 두 발도 다시 바닥에서 떨어졌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보호자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예전처럼 다리를 뻣뻣하게 굳히지는 않았습니다. 이어 발밑이 불안하거나 몸을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면 다리를 굳히고 무엇인가를 붙잡았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최면 중 함께 다뤘습니다. 발밑이 바로 닿지 않는 순간에도 안전한 지지점을 확인하고, 몸 전체를 굳히지 않은 채 필요한 만큼 움직일 수 있다는 이해를 넓혀 갔습니다.
딸과 나란히 건넌 다리
상담 뒤 이분은 주말에 다시 그 강가를 찾았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딸과 나란히 다리를 끝까지 건넜고, 바닥 격자 사이로 물이 비치는 구간에서는 잠깐 멈춰 난간 쪽에 선 딸의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공장에서도 창고 사다리에 올라가 높은 선반에 상자를 올려놓고 내려왔습니다. 누구를 부르지도, 올라가기 전에 일부러 숨을 고르지도 않았습니다. 사다리에서 내려와 장갑을 벗다가 그제야 방금 자신이 한 일을 알아차렸습니다.
높은 곳에서 몸이 굳는다고 자신을 나약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발밑이 불안할 때 다리에 힘을 주고 무언가를 붙잡곤 했습니다. 상담에서는 이 반응과 관련된 오래된 두려움을 함께 다뤘습니다.
앞으로 건너야 할 다리가 벌써 걱정된다면, 어느 지점에서 다리가 굳고 무엇을 붙잡고 싶어지는지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두려움이 시작되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알면 막연했던 불안도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공포증, 안전한 걸 아는데 왜 몸은 먼저 피할까? 원인·증상·치료와 최면상담 총정리
공포의 대상보다 어떤 순간에 몸과 주의가 먼저 반응하는지, 피하고 확인하는 흐름이 왜 반복되는지 한눈에 정리한 글입니다.
최면 원인치료란 무엇일까? 무의식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원리와 과정
반복되는 감정과 신체반응에서 출발해, 연결된 경험과 자동반응을 최면상담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