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선배,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길 건너서 갈게요.”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서른네 살 여성분이 출근길에 같은 팀 선배에게 한 말입니다. 지하철역 출구 앞 인도에는 비둘기 열 마리쯤이 모여 과자 부스러기를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얼굴 옆을 스쳤습니다. 그분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커피를 든 손끝이 차가워졌습니다. 신호등이 이미 깜빡이고 있었지만 뛰다시피 길을 건넜습니다. 맞은편 인도로 한 블록을 돌아 회사에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출근길만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와 걸을 때는 상대를 새가 있는 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점심을 광장 벤치에서 먹자는 말이 나오면 은행에 들를 일이 있다고 둘러댔습니다. 주변에서는 비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웃어넘겼습니다. 본인도 한동안은 비둘기가 지저분해서 싫은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비켜서 지나가는 길을, 그분은 아예 건너편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정 동물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그 대상을 피하느라 일상생활까지 불편해진다면 동물공포증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새를 두려워하는 경우는 조류공포증이라고도 합니다. 개에게 물린 뒤 개가 무서워진 것처럼 계기가 분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기억하는 한 새에게 쪼이거나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면상담 중 떠오른 어린 시절 장면에도 새는 없었습니다. 대신 시장 입구에서 펄럭이던 커다란 비닐이 있었습니다.
그 비닐을 보며 느낀 두려움은 비둘기와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무서운 것은 비둘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상담을 신청하기 전날 밤, 그분은 자신이 피하고 있는 것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 보았습니다. 비둘기가 모이는 지하철역 출구와 회사 앞 광장, 공원 산책로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참새 떼가 모이는 아파트 화단 옆길과 앵무새를 키우는 친구 집도 적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뜻밖의 한 가지가 더 떠올랐습니다. 바람에 비닐봉지가 펄럭이는 소리였습니다. 적어 놓고 보니 두려운 것은 비둘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펄럭이는 움직임과 소리가 있는 곳을 함께 피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놀랐을 때 본 움직임이나 들은 소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가지 대상만 무서웠더라도 피하는 일이 반복되면, 생김새나 움직임이 비슷한 대상까지 두려움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그분에게 비둘기와 참새, 앵무새와 펄럭이는 비닐은 전혀 다른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갑자기 얼굴 앞으로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도 두려움을 줄이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비둘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글을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공원 벤치에 앉아 멀리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는 연습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치에 내려앉아 날개를 퍼덕이자 벌떡 일어나 공원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뒤로는 공원 안이 아니라 공원 앞길까지 돌아서 다녔습니다.
“비둘기가 저를 해치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그 생각이 나기도 전에 발이 먼저 돌아서요.”
비둘기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몰라서 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목이 움츠러들고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처럼 생각보다 먼저 나타나는 몸의 반응에서 출발합니다. 그분과의 상담에서도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뻣뻣해지던 목덜미의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그 느낌을 따라가자 비둘기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새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시장이에요. 스피커에서 노래가 너무 크게 나와요.”
깊은 최면 상태에서 목덜미가 뻣뻣하게 당기는 느낌에 집중하던 중 나온 말입니다. 잠시 뒤 그분이 의아한 듯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새는 한 마리도 없어요.”
기저귀를 막 뗐을 무렵의 여자아이가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시장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스피커에서는 큰 소리로 노래가 흘러나왔고, 옆 가게 앞에는 물건을 덮어 놓은 커다란 비닐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바람이 불었습니다. 비닐 한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이의 얼굴 앞으로 확 들렸습니다. 무언가 자신을 덮치는 줄 안 아이는 목을 움츠리고 숨을 들이켰습니다. 곧바로 할머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다리 뒤로 숨었습니다.
비닐이 내려앉은 뒤에도 아이는 고개를 내밀지 못했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면 그것이 다시 얼굴 앞으로 날아올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고쳐 들고 걷기 시작하자 아이도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따라갔습니다.
어른이 된 그분은 최면 속에서 할머니 뒤에 숨어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갑자기 얼굴 앞으로 와서 많이 놀랐지. 저건 가게 물건을 덮어 놓은 비닐이야. 바람에 움직이는 거지, 너를 쫓아오는 게 아니야.” 그 말을 전한 뒤 같은 시장 장면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바람이 불자 비닐은 다시 펄럭였습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할머니 뒤로 숨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닐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슴은 잠시 두근거렸지만 비닐이 내려앉자 움츠렸던 목의 힘도 풀렸습니다.
비닐과 비둘기는 전혀 다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몸에는 같은 움직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갑자기 얼굴 앞으로 펄럭이며 날아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 그분이 목을 움츠리고 옆 사람 뒤로 물러났던 모습은, 시장에서 비닐을 피해 할머니 뒤로 숨었던 아이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무엇인가 갑자기 얼굴 앞으로 움직이면 실제 정체를 확인하기 전에 몸을 움츠리고 피했던 다른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놀라는 반응이 올라와도 그것이 자신을 덮치거나 쫓아오는지 살핀 뒤, 필요한 만큼만 비켜서서 지나갈 수 있다는 이해를 함께 다뤘습니다.
메모장에서 지운 한 줄
최면상담 뒤 어느 아침, 지하철역 출구 앞에는 비둘기 열 마리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분은 커피를 든 채 그 사이를 지나갔다고 합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 앞에서 날아오르자 반걸음 비켜서기는 했지만, 걸음을 멈추거나 길을 건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앵무새를 키우기 시작한 뒤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친구 집에도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새장 문이 열리자 앵무새가 날개를 몇 차례 퍼덕이더니 커튼 봉 위로 날아갔지만 그분은 소파에서 일어나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이어 가셨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어 피하는 장소 가운데 ‘친구 집’이라고 적어 둔 한 줄을 지우셨다고 합니다.
오늘도 비둘기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돌렸다면, 무엇이 가장 무서웠는지 한번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새 자체가 무서운 것인지, 갑자기 얼굴 앞으로 날아드는 움직임에 몸이 놀라는 것인지에 따라 두려움의 시작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아도 몸에는 남아 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비둘기가 두려운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면, 그 답은 비둘기가 한 마리도 없었던 오래전의 한 장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공포증, 안전한 걸 아는데 왜 몸은 먼저 피할까? 원인·증상·치료와 최면상담 총정리
공포의 대상보다 어떤 순간에 몸과 주의가 먼저 반응하는지, 피하고 확인하는 흐름이 왜 반복되는지 한눈에 정리한 글입니다.
최면 원인치료란 무엇일까? 무의식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원리와 과정
반복되는 감정과 신체반응에서 출발해, 연결된 경험과 자동반응을 최면상담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