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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야, 다음 휴게소에서 나 좀 내려 줘. 거기서 버스 타고 따라갈게. 농담 아니야.”
구청 민원실에서 일하는 스물아홉 살 남성분이 대학 동기들과 동해로 여름휴가를 가던 길에 한 말입니다.
도로가 한산해지자 운전하던 친구가 속도를 올렸습니다. 뒷자리의 두 친구는 창문을 내리고 신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그분은 왼손으로 문 위 손잡이를 움켜쥐고, 브레이크라도 밟듯 오른발로 차 바닥을 힘껏 눌렀습니다. 속도계 바늘이 올라갈 때마다 명치가 쑥 꺼지는 듯해 등을 좌석에 붙인 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내려 달라는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웃었습니다. 그분은 차가 휴게소 진입로에 들어서 속도를 줄인 뒤에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습니다. 손바닥에는 손잡이를 움켜쥔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습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땀에 젖어 등에 달라붙은 셔츠를 잡아당겨 떼어 냈다고 합니다.
고속도로에서만 무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장길에 KTX가 속력을 높여 창밖 전봇대가 휙휙 지나가면 창문 가림막부터 내렸습니다. 겨울마다 친구들이 스키장에 가자고 할 때도 핑계를 대며 피했습니다.
본인은 사고를 당한 적이 없었고, 운전하던 친구도 십 년 동안 교통법규 위반으로 딱지 한 장 떼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차에 속도만 붙으면 당장 사고가 날 것처럼 몸이 굳었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속도공포증을 검색했습니다. 남들은 즐기는 속도가 왜 자신에게는 그토록 무서운지 알고 싶었다고 합니다.
속도가 붙으면 발에 먼저 힘이 들어가는 이유
차가 빨라질 때 무엇이 가장 무서운지 떠올려 보세요. 길이 험하거나 운전이 거칠어서 불안한가요? 아니면 곧게 뻗은 빈 도로나 기차 안에서도 속도가 붙으면 무서워지나요? 후자라면 사고에 대한 걱정과 함께, 빨라지는 느낌 자체가 두려울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진단할 수는 없지만 두려움이 시작되는 순간을 짚어 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어떤 감각을 느낄 때마다 두려움이 되살아나는 현상은 ‘조건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크게 무서웠던 순간에 함께 느낀 감각이 나중에는 그때의 두려움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의자를 뒤로 젖히다가 넘어질 뻔한 일을 떠올려 보면 쉽습니다. 그 뒤로는 의자가 조금만 기울어도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정말 넘어질지 따져 보기도 전에 몸이 반응합니다. 그분도 차가 빨라지면 손잡이를 움켜쥐고 발로 바닥을 눌렀습니다.
창밖 먼 산을 보라는 조언
속도가 무섭다고 털어놓자 친구들은 창밖 먼 산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꾸 타 봐야 익숙해진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휴가 뒤에는 그 말대로 친구 차의 조수석에 여러 번 앉았습니다. 먼 곳을 보며 숨을 천천히 내쉬면 한결 견딜 만했습니다.
이런 연습으로 두려움이 줄어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 역시 동네 길에서는 손잡이를 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 합류해 차가 속력을 내면 오른발은 다시 바닥을 눌렀습니다.
“괜찮다고 속으로 말하잖아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에 벌써 힘이 들어가 있어요.”
최면상담에서는 이처럼 마음먹기 전에 나타나는 무의식 자동반응이 어떤 경험과 연결되는지 살펴봅니다. 그분과의 상담에서도 차가 빨라질 때 느끼는 긴장에서 출발해, 그 느낌과 함께 떠오른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다루었습니다.
아버지 손에 매달려 내려가던 골목길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분은 차 바닥을 힘껏 누르던 오른발의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금이 간 시멘트 골목길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해가 기울 무렵, 아직 몇 마디 말로 겨우 뜻을 전하던 아이가 아버지 손을 잡고 골목을 내려갑니다. 아버지는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걷습니다. 아이는 팔을 위로 뻗은 채 따라가지만 아버지의 보폭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샌들을 신은 발끝이 시멘트 턱에 걸릴 때마다 앞으로 휘청이고, 아버지 손에 매달려 발이 잠깐씩 땅에서 떨어집니다.
“아빠, 멈춰. 멈춰.”
아버지는 “다 왔어, 조금만” 하고는 걸음을 늦추지 않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발뒤꿈치를 땅에 대고 버팁니다. 넘어질 것 같아 멈추고 싶은데, 아버지가 계속 걸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골목 끝 큰길이 보이고 나서야 아버지의 걸음이 느려집니다.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는 그분도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골목 초입에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가는 것도 벅찬데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분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고 말했습니다.
“너한테는 너무 빠르구나. 멈추고 싶은데 아빠가 계속 가니까 무섭지. 저 큰길 보이지? 저기 가면 아빠가 천천히 걸을 거야. 발에 그렇게 힘주지 않아도 돼.”
그 말을 전한 뒤 골목길을 내려가던 일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성큼성큼 걸었고, 아이도 휘청이며 멈춰 달라고 울었습니다. 이번에도 큰길에 가까워져서야 걸음이 느려졌습니다.
아이는 이제 큰길까지만 가면 아버지가 천천히 걸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까지 끌려가야 할지 모르던 두려움이 줄자, 어떻게든 멈추려 발뒤꿈치로 버티던 힘도 풀렸습니다.
골목길의 아이도, 조수석의 그분도 너무 빨라 무서운데 스스로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발뒤꿈치로 땅을 버텼고, 그분은 오른발로 차 바닥을 눌렀습니다. 두 상황에서 발에 힘을 주던 반응은 어린 시절 골목에서 느낀 두려움과 이어져 있었을 수 있습니다. 최면에서는 움직임이 빨라졌는데 스스로 멈출 수 없으면 발과 몸에 힘을 주어 어떻게든 속도를 막으려 했던 다른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속도가 붙어도 끝없이 끌려가는 것은 아니며, 목적지와 멈출 지점을 알면서 몸을 굳히지 않고 이동을 이어 갈 수 있다는 이해를 함께 다뤘습니다.
조수석에서 휴대전화 지도를 보던 날
상담 뒤 이분은 동기들과 다시 동해에 다녀왔다고 전했습니다. 이번에도 조수석에 앉았지만, 한산한 도로에서 친구가 속도를 올리고 뒷자리 친구들이 창문을 내려도 오른발은 매트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습니다. 왼손에는 손잡이 대신 지도를 띄운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십 킬로 앞에 휴게소 있다. 거기서 커피 사자.”
어느 나들목으로 나가야 하는지, 어느 차선으로 가야 하는지 미리 알려 주며 운전하는 친구를 도왔다고 합니다. 부산 출장 때도 몇 시간 더 걸리는 버스 대신 KTX를 탔습니다. 창문 가림막을 올려 두고 창가에서 도시락도 먹었다고 합니다.
차가 빨라질 때마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발로 바닥을 누른다면,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자기 힘으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괜찮다고 다짐해도 몸이 먼저 굳는다면, 그 두려움과 이어진 경험을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당시의 감정과 지금 되풀이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함께 다룹니다. 그분은 상담 뒤 차나 기차에서 몸을 굳히고 버티던 시간이 줄고,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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