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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유치원에서 연밭 체험을 다녀와서 말린 연밥을 제 손바닥에 올려 줬어요. 아빠 이거 봐, 구멍마다 씨앗이 들었어, 하면서요.
들여다보는 순간 팔뚝에 소름이 쫙 돋고 목구멍으로 뭐가 치밀어 올랐어요.
저도 모르게 손을 털어서 그걸 바닥에 떨어뜨렸고, 애는 금방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물류 회사에서 배차를 맡고 있는 마흔 살 남성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딸이 잠든 뒤 떨어진 연밥을 종이봉투에 담아 신발장 서랍 맨 안쪽에 넣어 두었다고 합니다. 버리면 딸이 찾을 것 같고, 거실에 두면 자꾸 눈에 띄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연밥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워기 헤드가 보이지 않게 눈을 감고 머리를 감았고, 마트에서는 딸기 진열대를 피해 돌아갔습니다. 휴대전화에 벌집 사진이 뜨면 화면을 엎어 놓았습니다. 잠깐 봤을 뿐인데도 목덜미가 한참 근질거려 손톱으로 긁곤 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밤길에서 개가 짖거나 고속도로에서 앞차가 급정거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칠 일도 없는 씨앗 구멍 앞에서는 몸이 먼저 뒤로 물러났습니다. 검색 끝에 환공포증이라는 이름을 찾았지만, 이름을 알고 나서도 소름은 그대로였습니다.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도 왜 이렇게 피하게 되는 걸까요.
실물이 아니어도 소름이 돋는다면
환공포증은 연밥이나 벌집처럼 작은 구멍이 모인 모습을 볼 때 강한 불편이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생기는 이유는 아직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고, 반응의 세기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실제 물체를 볼 때와 사진이나 그림으로 볼 때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손에 닿지도 않는 사진을 보고 소름이 돋거나 속이 울렁거린다면, 만지는 것보다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한 셈입니다. 이것만으로 진단할 수는 없지만, 무엇 때문에 힘든지 이해하는 단서는 됩니다. 그분도 딸의 그림책에 개구리알이 그려져 있으면 책을 덮곤 했습니다.
피해도 뜻밖의 곳에서 마주치는 무늬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휴대전화 광고 설정을 바꾸고, 딸기 대신 귤을 사고, 욕실에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보지 않는 동안은 한결 편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야 할 물건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반대로 해 보았습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진다는 글을 읽고, 밤마다 연꽃 씨방 사진을 찾아 조금씩 더 오래 보았습니다. 사진 한 장을 십 초 넘게 볼 수 있는 날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말 아침 식탁에 딸기 한 접시가 올라오자, 다시 목구멍이 조여 왔습니다.
그날을 이야기하며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기 점이 씨앗인 줄 누가 모릅니까. 아는데도 몸이 먼저 뒤로 가요.” 연습한 사진은 전보다 편하게 볼 수 있었지만, 다른 물건 앞에서는 여전히 힘들었던 것입니다.
왜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의 반응이 다를까요. 어떤 대상을 보면서 강한 감정을 느끼면, 나중에는 비슷한 것만 보아도 그 감정이 저절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를 조건화라고 합니다. 작은 구멍이 모인 모습을 볼 때 징그러움과 불안이 함께 드는 것도 이렇게 익힌 반응일 수 있습니다.
검색창에 글자 몇 개만 입력해도 관련 단어가 먼저 뜨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멍이 모인 모습을 보는 순간, 무엇인지 살피기도 전에 ‘징그럽다, 얼른 치워야겠다’는 느낌부터 드는 것입니다. 그 뒤에야 안전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따라오니, 괜찮다고 스스로 타일러도 몸은 이미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저절로 올라오는 소름과 목이 조이는 느낌에서 출발해 관련된 경험을 살펴봅니다. 당시 무엇을 느꼈고,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함께 다루는 것입니다. 그분의 상담도 연밥을 보았을 때의 느낌에서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내려놓은 연밥
최면이 깊어지자 그분은 딸이 연밥을 손바닥에 올려 주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윗입술이 들리고 목 안쪽이 조여 오는 느낌에 집중하던 중, 어린 시절 할머니 집 부엌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식탁 의자에 혼자 올라가지 못하던 무렵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래 두었던 연밥에서 씨앗을 꺼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옆으로 다가가자 구멍이 촘촘히 난 연밥을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아이는 검게 보이는 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씨앗을 만져 보려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꺼낸 씨앗 하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안에 든 씨앗이 상해 있었던 것입니다. “으, 이게 뭐야.” 할머니는 아이 손의 연밥까지 얼른 가져가 내려놓았습니다. 아이가 다시 다가가자 손바닥을 내밀었습니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만지면 큰일 나.”
방금까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인데, 만지면 큰일이 난다고 합니다. 아이는 연밥의 검은 구멍과 할머니 얼굴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구멍 안에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놀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코를 찡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지만 목은 여전히 막힌 듯했습니다. 어깨를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할머니는 연밥을 봉지에 담아 밖에 내놓고 손을 씻었습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연밥을 빼앗긴 어린 자신에게 그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안에 든 씨앗이 상해서 놀라신 거야. 구멍이 무서운 건 아니야. 상한 씨앗은 버리면 돼. 네가 그걸 봤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아.”
그런 다음 같은 부엌 장면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할머니는 똑같이 얼굴을 찡그렸고, 아이 손에서 연밥을 가져가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도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구멍 속에 무서운 것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씨앗이 상해서 치우는 것임을 알자 목이 막히는 느낌과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었습니다.
어린 그분에게는 구멍이 모인 모습과 “만지면 큰일 나”라는 말이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연밥만 보아도 먼저 물러나게 하던 그 두려움을 다루었습니다.
신발장 서랍에서 다시 꺼낸 연밥
상담 후 그분은 딸과 함께 연밥의 씨앗을 꺼냈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신발장 서랍 맨 안쪽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거실 탁자에 놓고, 딸과 이쑤시개를 하나씩 나눠 들었습니다. 딸이 씨앗을 밀어내면 그분이 받아 접시에 담았습니다. 함께 소리 내어 스물한 개를 다 센 뒤, 딸은 연밥을 유치원 가방에 챙겨 넣었다고 합니다.
욕실에서도 눈을 뜨고 머리를 감는다고 하셨습니다. 물줄기가 한쪽으로 튀던 샤워기 헤드를 빼서 막힌 구멍을 칫솔로 하나씩 닦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여러 번 부탁했지만 그동안 번번이 미뤘던 일이었습니다.
작은 구멍이 모인 모습을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위가 약한 사람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무늬를 볼 때마다 올라오던 징그러움과 불안을 어린 시절 경험과 함께 다루었습니다.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더 나아가, 실제로 마주했을 때도 덜 불편해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딸과 함께 연밥의 씨앗을 꺼낸 일은 그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