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떨지 말자. 오늘은 안 떤다. 첫마디만 넘기면 된다."
회의 시작 오 분 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 여성분이 입속으로 되뇌던 말입니다. 그런데 회의실 화면에 첫 장을 띄우고 "이번 분기 신제품 기획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입을 떼자 목소리 끝이 가늘게 흔들렸습니다. 떨림을 누르려고 목에 힘을 주니 이번에는 소리가 갈라졌습니다. 턱이 잘게 흔들리고, 테이블 아래에서는 무릎까지 달달 떨렸습니다.
그분은 화장품 회사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서른다섯 살 대리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본부장과 팀장 스무 명 앞에서 기획안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발표공포증을 처음 검색한 것도 그런 회의가 끝난 날 밤이었다고 합니다.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해 본 방법은 많았습니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레이저 포인터를 쥔 손은 등 뒤로 감추었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릴 것 같은 대목은 빠르게 읽고 넘어갔고, 물병도 늘 옆에 두었습니다. 동료들은 하나도 티가 안 났다고 했지만,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갈라지던 자기 목소리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준비를 더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을수록 떨림은 오히려 커졌습니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왜 더 떨리는 걸까요.
증명사진 앞에서 떨리던 입꼬리
자기초점주의는 누군가 나를 평가한다고 느낄 때, 듣는 사람의 표정이나 전하려던 내용보다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 상태를 계속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지금 목소리가 떨리나, 얼굴이 빨개졌나’를 살피다 보니 더 긴장하고, 긴장이 커지면서 떨림도 심해질 수 있습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진사가 “웃으세요” 하고 셔터를 바로 누르지 않으면, 웃고 있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기도 합니다. 웃는 표정을 유지하려고 입가에 신경을 쓸수록 힘이 들어가고, 떨림은 더 두드러집니다.
발표 중에도 떨림을 막으려다 몸에 더 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헛기침을 하거나 손을 감추는 동안에도 떨림이 들키지는 않았는지 자꾸 확인하게 됩니다. 감추려는 노력이 오히려 내 몸에 더 신경을 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도 그랬습니다. 본부장이 무엇을 물었는지는 회의가 끝나고 동료에게 다시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겠습니다'에서 갈라지던 소리는 몇 번이고 귀에 되살아났습니다.
지난 발표가 끝난 뒤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지 생각해 보세요. 누가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질문이 나왔는지는 흐릿한데 내 목소리만 또렷하게 기억나나요? 그렇다면 발표 내용보다 자신의 떨림을 살피는 데 더 신경을 썼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진단할 수는 없지만, 발표 중 어디에 신경이 쏠렸는지 돌아보는 단서는 됩니다.
원고를 외워도 첫마디는 흔들렸다
발표가 불안하면 우선 연습을 더 하게 됩니다. 그분도 원고를 거의 외울 만큼 읽었습니다. 내용을 충분히 익히면 자신감이 생기고 말이 막히는 대목도 줄어듭니다. 그런데 그분은 내용을 잘 알고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면 자기 목소리부터 살폈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두근거림이나 떨림을 줄이며 발표를 치르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도 약을 먹은 날은 한결 수월했다고 합니다. 다만 약 없이 들어간 회의에서는 첫마디부터 다시 목소리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를 확인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면 어느새 떨고 있는지부터 살피게 됩니다. 이처럼 의식하기도 전에 나타나는 반응은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 바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발표할 때 느끼는 긴장과 몸의 느낌을 살펴보고, 그 반응과 연결된 오래된 경험과 감정을 함께 다룹니다.
현관에 서서 기다리던 가족
그분은 발표 직전에 목젖 아래가 좁아지는 듯한 느낌이 가장 먼저 든다고 했습니다. 그 느낌을 이야기하면서도 침을 여러 번 삼켰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목이 좁아지는 느낌에 집중하자, 회의실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혼자 신발 신기를 막 배우던 무렵의 집 현관이었습니다. 어린 그분은 현관 턱에 앉아 있었고, 외출 준비를 마친 할머니와 아빠, 고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마디씩 보탰습니다. 혼자 신어 보라는 말, 찍찍이부터 떼라는 말, 그건 반대쪽 신발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는 찍찍이를 잡아당겼지만 자꾸 엉뚱한 곳에 붙었습니다. 어른들이 내려다보며 빨리 하라고 하니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또 잘못하면 한마디를 들을 것 같아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폈습니다. 빨리 끝내고 싶은데 손에는 더 힘이 들어갔고, 숨도 꾹 참게 됐습니다.
한참 뒤 찍찍이가 비뚤게 붙은 채로 신발을 다 신자, 가족은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어른이 된 그분은 그 장면 속 어린 자신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습니다. “처음 해 보는 거라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해. 다들 너랑 같이 나가려고 기다리는 거야. 서툴다고 네가 잘못한 건 아니야.”
그 말을 전한 뒤, 신발을 신던 일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어른들은 여전히 한꺼번에 말을 보탰고, 찍찍이도 비뚤게 붙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촉하는 말이 들려도 손에 힘이 덜 들어갔고, 어른들 얼굴을 올려다봐도 숨을 참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담실에서 자꾸 침을 삼키던 것도 그 사이 멎었습니다.
현관에서는 신발을 제대로 신는지, 회의실에서는 목소리가 떨리는지를 살폈습니다. 하는 일은 달랐지만, 사람들이 지켜볼 때 잘못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자신을 확인한다는 점은 닮아 있었습니다. 그분의 상담에서는 이런 부담감과 함께 어린 시절의 감정을 다뤘습니다.
샘플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걸은 날
요즘 그분은 발표 전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다짐을 되뇌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번 분기 기획 회의에서 있었던 일도 들려주셨습니다.
첫 화면을 띄우고 인사한 뒤, 원고에 없던 말을 꺼낸 것입니다. “설명보다 직접 발라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테이블 사이를 돌며 샘플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넸습니다. 본부장이 손등에 발라 보는 동안에는 제품의 발림성을 설명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메모를 정리하는데, 머릿속에 남은 것은 본부장이 향이 조금 강하다고 한 말과 옆 팀장이 가격을 두 번 물은 장면이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는지는 한참 뒤에야 생각났고, 떠올려 보려 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떨지 말자는 다짐에는 발표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 때문에 목소리가 떨리는지만 계속 확인한다면, 애쓸수록 더 긴장할 수 있습니다.
지난 발표를 떠올릴 때 듣는 사람들의 반응보다 내 떨림만 기억난다면, 사람들이 지켜보는 순간 왜 자신부터 살피게 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때 느끼는 부담감과 연결된 경험을 살펴보며, 전하려는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