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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제가 순서를…"
세 번째 슬라이드를 넘긴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할 말의 첫마디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자기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고, 목덜미의 열기가 얼굴까지 번졌습니다. 혀는 입천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열두 명이 앉은 회의실에서 그분은 리모컨을 쥔 채 화면만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식품회사 연구소에서 일하는 서른두 살 여성분이 월례 회의에서 겪은 일입니다. 발표 내용은 석 달 동안 직접 실험하고 정리한 결과였습니다. 전날 밤에는 대본을 스무 번 넘게 소리 내어 읽었고, 출근길 버스에서도 입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되뇌었다고 합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는 더 답답한 일이 생겼습니다. 복도에서 옆 팀 동료가 아까 그 수치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회의실에서는 나오지 않던 설명이 줄줄 이어졌습니다. 세 번째 슬라이드에서 하려던 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올랐습니다. "모르는 내용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 앞에서만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발표를 마치고 나서야 막혔던 말이 떠오른 적이 있으신가요? 나중에는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내용을 잊은 것이 아니라 발표하는 순간에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도 연습량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외운 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자판을 두드릴 때처럼, 여러 번 되풀이해 익힌 동작은 순서를 하나하나 생각하지 않아도 이어집니다. 이를 절차기억이라고 합니다.
발표 내용을 외우는 기억과 똑같지는 않지만, 익숙한 말도 다음 문장이 맞는지 지나치게 신경 쓰면 자연스러운 흐름이 끊길 수 있습니다.
매일 누르는 현관 도어락을 떠올려 보세요. 평소에는 생각 없이 누르던 번호도 장바구니를 든 채 한 번 잘못 눌러 경고음이 울리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숫자를 하나씩 떠올리다가, 세 번째 숫자 앞에서 손가락이 멈춥니다. 7이었는지 1이었는지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분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혼자 연습할 때는 한 번도 안 막혔어요. 그런데 회의실에서는 첫 문장을 말하면서 벌써 다음 문장이 맞는지 속으로 따지고 있더라고요."
말이 한 번 끊기면 더 다급하게 기억을 더듬게 됩니다. 그분도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외운 문장을 틀리지 않는 데 신경이 쏠렸습니다.
발표에서 막힌 경험이 쌓이면 날짜가 잡힐 때부터 긴장하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틀릴까 걱정하게 됩니다.
대본을 한 번 더 외워도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많은 분이 연습부터 늘립니다. 그분도 다음 발표를 앞두고 대본을 토씨까지 외웠고, 슬라이드마다 첫 문장을 작은 글씨로 적어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발표에서 또 말이 끊겼다고 합니다.
연습은 내용을 익히고 막힌 뒤 다시 이어 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혼자서는 끝까지 말하다가도 사람들 앞에서는 다음 문장이 맞는지 확인하느라 막혔습니다. 얼마나 연습했는지와 함께, 발표 중 무엇에 신경이 쏠리는지도 살펴봐야 했습니다.
발표 전 두근거림이 심해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 분도 있습니다. 처방받은 약은 긴장이나 두근거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약의 도움을 받아도 말을 틀리지 않으려 계속 확인하는 어려움이 남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은 상담실에서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긴장만 안 하면 될 것 같아서, 발표 들어가기 전에 긴장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되뇌어요. 그러면 더 굳어요."
긴장하지 말자는 다짐도 자칫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살피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도 다음 말을 확인하는 버릇이 마음먹는 대로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런 무의식의 자동반응과 관련된 경험을 살펴봅니다. 머리가 하얘지기 직전에 느끼는 몸의 감각에서 시작해, 함께 떠오르는 오래된 경험과 당시의 감정을 다룹니다.
단추를 끼우던 작은 손
최면이 충분히 깊어지자, 발표 때 목덜미부터 번지던 열기가 다시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에 집중하던 중 회의실 대신 어린 시절의 방 한 칸이 떠올랐습니다.
혼자 단추 끼우기를 막 배우던 무렵입니다. 외출하기로 한 날 아침, 아이가 방바닥에 앉아 셔츠 단추를 맨 아래부터 끼웁니다. 마지막 단추까지 끼우고 일어서는데, 한 칸씩 밀려 한쪽 옷깃이 턱밑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가방을 챙기던 어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 모습을 봅니다. 벌써 늦었다는 말과 함께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것 하나 제대로 못 해? 다 풀어. 처음부터 다시 해." 아이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숨을 참고 단추를 하나씩 풉니다.
다시 끼울 때는 또 틀려서 혼날까 봐 단추 하나도 쉽게 끼우지 못합니다. 단추를 집고 구멍을 짚어 둘이 맞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밀어 넣습니다. 네 번째 단추쯤에서 손이 멈춥니다. 아까는 끝까지 끼웠는데, 이번에는 어디까지 했는지조차 헷갈립니다.
장면은 그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아침마다 단추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어 가며 끼우는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방바닥에 앉은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직 단추 끼우기를 배우는 중이니 한 칸 밀릴 수도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잘못 끼웠다면 다시 끼우면 되고, 실수했다고 모자란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했습니다.
그 말을 전한 뒤 그날 아침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어른은 이번에도 방문을 열고 들어와 똑같이 목소리를 높였고, 아이는 단추를 전부 풀어 다시 끼웠습니다.
다만 목에서 느껴지던 열기가 얼굴까지 번지지는 않았고, 단추를 푸는 동안에도 숨을 참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또 틀리면 어떡하지' 하던 마음 대신 '틀리면 다시 풀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최면을 마친 뒤 그분이 먼저 물었습니다. "단추 한 칸 잘못 끼운 게 이렇게까지 남을 일인가요?"
아이에게는 단추가 한 칸 밀린 일보다 다시 틀리면 혼난다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단추를 끼울 때도 발표할 때도, 틀리지 않으려고 하나씩 확인하다가 오히려 하던 일을 이어 가지 못했습니다. 상담에서는 이 두려움과 확인하는 반응을 함께 다뤘습니다.
숫자 하나를 잘못 읽은 날
상담 뒤 월례 회의에서 그분은 다시 세 번째 슬라이드 앞에 섰다고 합니다. 설명 도중 실험 온도의 숫자 하나를 잘못 읽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말이 끊기고 목덜미가 달아올랐을 대목입니다. 이번에는 "아, 72도가 아니라 78도입니다"라고 고쳐 말하고 다음 설명으로 넘어갔습니다.
질의응답에서는 대본에 없던 질문이 두 개 나왔습니다. 그분은 슬라이드를 앞으로 되돌려 그래프를 짚어 가며 답했습니다. 회의실을 나와 복도를 걸을 때 뒤늦게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고 합니다. 할 말은 이미 회의실 안에서 다 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준비했는데도 발표할 때 머리가 하얘진다면, 외운 양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말 한마디를 틀리지 않는 것보다 실수해도 고쳐 말하고 계속할 수 있다는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다음 발표를 앞두고 대본을 몇 번째 고쳐 쓰고 계신가요? 그분처럼 혼자서는 잘되던 말이 사람들 앞에서만 막힌다면, 그 순간 무엇이 걱정돼 자꾸 확인하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마음과 이어진 경험을 함께 살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