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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말 보고서 파일을 열어 놓고 한 시간째 제목만 보고 있어요.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명치가 꽉 조이고 손바닥이 축축해져요.
겨우 절반쯤 쓰다가 숫자 하나가 안 맞으면 목덜미가 확 뜨거워지고, 정신 차려 보면 다른 창을 열어 딴 일을 하고 있어요.
거실에는 조립하다 만 책장이 석 달째 누워 있고요."
식자재 유통회사 영업관리팀에서 일하는 서른여섯 살 남성분이 상담 첫날 꺼낸 이야기입니다. 2년 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먹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약을 먹은 뒤로는 회의 중에 딴생각을 하는 일이 줄었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순간만은 약을 먹는 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을 처음 시작하려는 순간, 그리고 하던 일이 중간에 막히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스스로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원래 뭐든 하다 마는 사람이라서요."
약도 먹고 알람도 맞추고 할 일 목록도 써 봤는데, 왜 시작과 마무리는 여전히 어려울까요? 그분에게는 주의를 유지하는 어려움과 함께, 막힐 때마다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인 ADHD는 뇌의 발달 특성과 관련된 상태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단과 감별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울이나 불안, 수면 문제로도 비슷한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어린 시절 경험이 ADHD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단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일 앞에서 긴장하고 자책하는 분들이 따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을 다룹니다.
다음 순서를 놓치는 순간
무엇부터 해야 할지 정하고, 하던 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 단계로 이어 가는 데에는 실행기능이 관여합니다. 성인 ADHD에서는 이런 과정에 어려움을 겪어 시작이 늦어지거나, 하던 일을 끝까지 이어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내비게이션 안내가 수시로 끊긴다고 생각해 보세요. 목적지는 알아도 갈림길마다 멈춰 다음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일을 끝내고 싶어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놓치면 그만큼 이어 가기 어렵습니다.
그분처럼 일을 앞두고 몸부터 긴장한다면 또 다른 어려움이 겹쳐 있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멈춘 경험이 쌓이면 시작하기도 전에 ‘이번에도 못 끝낼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때 파일을 닫거나 다른 일로 옮겨 가면 긴장이 잠깐 가라앉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막히는 순간 하던 일을 피하는 데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일이 끊긴 순간을 적어 보면
일이 끊기는 순간을 적어 보면 무엇이 어려운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며칠 동안 손을 놓기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짧게 적어 보세요. 알림 소리나 문득 떠오른 생각을 따라 다른 일을 했다면 주의가 흐트러졌을 수 있습니다. 반면 시작하려 하거나 막히는 대목에서 몸이 굳고 ‘어차피 안 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긴장과 자책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이 함께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진단을 대신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이 일주일 동안 적어 온 메모에는 긴장한 뒤 손을 놓은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거래처 수치가 맞지 않는 칸, 팀장에게 물어봐야 하는 문장, 책장 설명서의 그림이 헷갈리는 단계에서 목덜미가 뜨거워졌고 곧바로 손을 놓았습니다.
약은 주의를 유지하는 데, 알람과 할 일 목록은 다음 순서를 잊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도 이 방법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히는 칸 앞에서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명치가 조이고 ‘역시 난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이번엔 끝까지 하자”고 다짐할수록, 또 멈췄을 때의 자책만 커졌다고 합니다.
그분은 일부러 긴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 보자고 생각하는 사이 이미 가슴이 조였습니다. 오래 반복된 반응은 결심만으로 바로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ADHD라는 진단 자체보다, 일을 시작하거나 중간에 막힐 때 저절로 올라오는 긴장과 부끄러움에 주목했습니다. 이런 무의식의 자동반응과 이어진 경험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놀이터 미끄럼틀의 네 번째 계단
그분과의 상담에서도 목덜미가 뜨거워지던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보고서 앞에 앉았을 때의 열감을 느끼던 그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놀이터가 보여요.”
아직 걸음이 뒤뚱거리는 아이가 동네 놀이터의 낮은 미끄럼틀 계단을 혼자 오릅니다. 어른 허리께 오는 미끄럼틀이지만, 아이에게는 계단 한 칸 한 칸이 높습니다. 네 번째 계단에 발을 올리자 계단 틈으로 모래 바닥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입니다. 아이는 차가운 쇠 난간을 두 손으로 붙든 채 더는 발을 떼지 못합니다.
아래에서 보호자가 손짓하며 재촉합니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지. 얼른 올라가." 아이는 한 발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습니다.
몇 번 재촉이 이어진 끝에 보호자가 계단을 올라와 아이를 안아 내립니다. 모래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으며 한마디가 따라옵니다. "넌 하다 말아."
아이는 무서워서 올라가지 못했는데, 내려온 뒤에는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부끄럽습니다. 그분은 “미끄럼틀이 여기서 왜 나와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다 “넌 하다 말아”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보고서 앞에서처럼 목덜미가 달아올랐다고 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난간을 붙든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작은 아이에게는 그 높이가 무서울 수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올라가지 못한 건 무서웠기 때문이지, 못난 아이여서가 아니라고 전했습니다. “넌 하다 말아”라는 말도 그날 멈춘 모습만 보고 한 말이지, 아이가 늘 그렇다는 뜻은 아니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이해를 가지고 같은 놀이터 장면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아이는 네 번째 계단에서 멈췄습니다. 보호자는 재촉하다가 올라와 아이를 안아 내렸고, “넌 하다 말아”라는 말도 그대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말을 들어도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내려오는 것이지 자신이 못난 것은 아니라는 마음으로, 안겨 내려오는 동안 팔과 등에도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미끄럼틀에서는 무서워서 멈췄고, 보고서에서는 해결할 부분이 있어 멈췄습니다. 멈춘 이유는 달랐지만 그분에게는 모두 자신이 못났다는 부끄러움으로 이어졌을 수 있습니다. 상담에서는 잠시 멈추는 일과 자신을 ‘하다 마는 사람’으로 여기는 마음을 구분해 다뤘습니다.
막힌 칸 옆에 적어 둔 한 줄
그분은 지금도 월말이면 같은 보고서를 씁니다. 거래처 수치가 맞지 않는 칸에서 손이 멈추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칸 앞에서 명치가 조여 오지 않고, 파일을 닫는 대신 칸 옆에 '수치 확인, 내일 오전'이라고 적어 둔 뒤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팀장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막혀서요, 수치만 확인하고 오후에 드리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막혔다고 말하는 것이 또 하다 말았다고 들키는 일처럼 느껴져, 마감 날까지 파일을 숨겨 두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말에는 석 달째 거실에 누워 있던 책장도 세웠습니다. 조립하다 나사 두 개가 모자라 중간에 손을 멈췄는데, 그 길로 철물점에 다녀와 마저 조였다고 합니다.
성인 ADHD로 일의 순서를 놓치거나 주의를 유지하기 어렵다면 병원 치료와 생활 속 도구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이와 함께, 일이 막힐 때마다 자신을 탓하며 손을 놓는 반응을 다루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화면에 떠 있는 반쯤 쓰다 만 문서를 볼 때마다 가슴부터 무거워지시나요? 그분처럼 막힌 부분보다 ‘나는 왜 늘 이럴까’ 하는 자책이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체인지 심리최면상담센터에서는 이런 긴장과 부끄러움에 얽힌 경험을 살피며, 멈췄던 일을 다시 이어 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