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팀장님, 죄송한데
기획안은 점심 전까지 드려도 될까요?"
아침 여섯 시 오십 분에 팀장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보낸 사람은 가구 회사 온라인몰에서 신상품 상세페이지를 기획하는 서른세 살 여성입니다. 원래 마감은 그날 아침 아홉 시였고, 기획안을 맡은 것은 열흘 전이었습니다.
전날 밤 아홉 시, 식탁에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파일 이름만 적힌 빈 문서에서 커서가 깜빡이자 명치가 조여 오고 목덜미가 뻣뻣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바탕화면의 폴더를 정리하고, 문서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습니다. 노트북을 덮을 때마다 조이던 가슴이 스르르 풀렸다고 합니다.
첫 줄을 쓴 것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습니다. 막상 쓰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빠르게 써 내려갔지만, 동이 틀 무렵에도 기획안은 절반밖에 채우지 못했습니다. 초안을 미리 보여 달라는 팀장의 요청에는 매번 거의 다 됐다고만 답해 왔습니다. 새 기획안을 맡을 때마다 비슷한 밤이 되풀이됐습니다.
미루는 습관을 고치려고 할 일 목록 앱을 깔고, 25분짜리 타이머를 맞추고, 마감을 이틀 앞당겨 달력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자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다그쳤습니다. 혹시 성인 ADHD 때문에 자꾸 미루는 건 아닐까 싶어, 밤새 자가진단 글을 찾아 읽은 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모든 일을 미루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래처 연락에는 바로 회신하고, 택배 반품 신청도 그날 처리했습니다. 손이 멈추는 것은 늘 기획안처럼 누군가 읽고 판단할 일 앞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그런 일 앞에서만 시작이 자꾸 뒤로 밀리는 걸까요.
미룬 일을 두 줄로 나눠 보면
미루기는 성인 ADHD에서 흔한 어려움이지만, 미룬다고 해서 모두 ADHD인 것은 아닙니다. 우울감이 깊거나 불안이 높을 때, 잠이 모자라거나 일이 한꺼번에 몰릴 때도 미루는 일이 늘어납니다.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시작과 마무리가 두루 어렵고 주의가 자꾸 흩어진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평가를 받아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떤 일을 미루는지 나눠 보면 시작을 어렵게 하는 이유를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미룬 일 가운데 누군가 결과를 보거나, 잘못할까 봐 걱정되는 일을 첫째 줄에, 그렇지 않은 일을 둘째 줄에 적어 보는 것입니다. 첫째 줄에 적힌 일이 많고 막상 시작하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된다면, 일을 해내는 능력보다 시작할 때의 긴장이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이분의 목록도 첫째 줄만 빼곡했습니다.
누르는 순간 조용해지는 다시 알림
부적 강화는 어떤 행동을 한 뒤 불편한 느낌이 줄어들면 그 행동을 되풀이하기 쉬워지는 현상입니다. 이분에게는 문서를 닫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당장의 긴장을 피하는 방법이 된 셈입니다. 노트북을 덮으면 편해지지만, 다음에는 다시 열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미룬 대가는 마감이 닥쳐야 실감하지만, 안도는 문서를 닫는 순간 찾아옵니다. 당장 편해지는 경험이 쌓이면 다음에도 일을 미루기 쉽습니다. 새벽마다 후회하면서도 새 기획안 앞에서는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드는 것입니다. 원래 일을 시작하거나 다른 일로 전환하기 어려운 분이라면 이 반복에서 벗어나기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 알람의 다시 알림 버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알람이 멈추고 몇 분 더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아침이 반복되면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버튼부터 찾게 됩니다. 이분이 빈 문서 앞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드는 것도 비슷했습니다. 알람이 다시 울리듯 기획안도 결국 해야 하지만, 미루는 동안에는 긴장이 잠시 가라앉았습니다.
잘게 나눠도 첫 줄 앞에서 멈추는 손
이분이 써 본 방법들도 쓸모가 있었습니다. 기획안을 ‘경쟁사 페이지 세 곳 보기’, ‘제목 후보 적기’처럼 나누자 무엇부터 할지 분명해졌고, 타이머를 맞추면 25분은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 후보 하나도 결국 누군가 읽고 판단할 기획안의 일부였습니다. 적으려는 순간 명치가 다시 조여 왔고, 타이머로 시간을 재는 동안에도 쇼핑 앱을 열었습니다. 할 일을 작게 나눠도 시작할 때 몸이 굳고, 미루면 편해지는 모습은 여전했습니다.
일부러 오늘도 미루자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일을 열면 몸이 먼저 굳었고, 어느새 손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결정하기 전에 저절로 나타나는 반응을 무의식의 자동반응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꼭 하겠다고 다짐해도 막상 문서를 열면 다시 긴장하니 시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일을 시작할 때 몸이 굳는 느낌에 집중하며, 그 긴장과 이어지는 오래전 경험을 살펴봅니다. 당시 어떤 마음이었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함께 다루는 것입니다.
손대지 않은 크레파스
상담에서 빈 문서를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여쭤봤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손이 저절로 무릎 위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깊은 최면에 든 뒤 그 손끝의 느낌에 집중하자 어린 시절의 작은 방이 떠올랐습니다.
색 이름을 아직 몇 개밖에 모르던 무렵의 아이가 방바닥에 앉아 있고, 주위에는 크레파스가 흩어져 있습니다. 문간에서 어른이 말합니다. "다 그렸으면 크레파스 곽에 넣어 놔."
곽에는 색마다 들어갈 칸이 정해져 있습니다. 며칠 전 아이가 초록색을 파란색 칸에 꽂았을 때, 어른은 곽을 들어 보이며 “이게 여기 들어가니? 잘 보고 넣어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또 틀릴까 봐 흩어진 크레파스를 보고도 손을 뻗지 못합니다. 목을 움츠린 채 옆에 있던 장난감 자동차를 끌어와 손가락으로 바퀴만 굴립니다.
한참 뒤 어른이 다시 들어옵니다. 짧게 한숨을 쉬고 쪼그려 앉아 크레파스를 하나씩 칸에 꽂습니다. 곽이 딸깍 닫히자 아이의 목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지고, 바퀴를 굴리던 손가락도 멈춥니다. 아이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쉽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이분은 크레파스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느 칸에 넣어야 할지 헷갈릴 수 있고, 잘못 넣어도 꺼내서 옮기면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크레파스 하나를 잘못 넣었다고 아이가 못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전했습니다.
그 말을 전한 뒤 같은 저녁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크레파스에 손을 대지 않고 바퀴를 굴렸고, 어른은 한참 뒤 들어와 크레파스를 칸에 꽂았습니다. 이번에는 칸을 틀려도 다시 옮기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흩어진 크레파스를 보면서도 목을 움츠리지 않았고 손끝도 차갑지 않았습니다. 숨을 참고 기다리지 않았기에 곽이 닫힐 때 길게 내쉬던 숨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상담 중 이분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었습니다. 장면이 끝날 즈음에는 아랫입술을 물던 힘을 풀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또 틀릴까 봐 크레파스를 만지지 못했고, 지금은 누군가 읽고 판단할 기획안 앞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아이는 어른이 대신 정리를 끝내자 안도했고, 이분은 문서를 덮으면 잠시 편해졌습니다. 상담에서는 잘못할까 봐 시작을 피하게 되는 마음에 주목했습니다.
이틀 먼저 보낸 메시지
상담 뒤 새 소파 시리즈의 기획안을 맡았을 때는 달랐다고 합니다.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책상으로 가 파일부터 만들었습니다. 제목 줄에 가제를 적고, 그 아래에 떠오르는 단어 몇 개를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순서도 맞춤법도 엉망이었지만 문서 창을 닫지 않고 계속 써 내려갔습니다.
마감을 이틀 앞둔 오후에는 절반쯤 채운 초안을 팀장에게 먼저 보냈다고 합니다. “방향이 맞는지 먼저 한번 봐 주실 수 있을까요?” 예전 같으면 거의 다 됐다는 말만 하고 끝까지 혼자 붙들고 있었을 파일이었습니다. 그 주에는 밤늦게 식탁에서 노트북을 열 일도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미뤄 둔 파일 하나가 떠오르셨나요? 일을 시작하려 하면 긴장하고, 다른 일을 할 때 잠시 편해지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분에게도 시작을 막았던 것은 잘못할까 봐 굳어 버리는 마음이었습니다. 매번 의지를 다잡아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 긴장이 어떤 경험과 이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