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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나 이제 나가. 이십 분만 기다려 줘."
화장대 앞에서 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두 시간 전부터 외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머리를 감았고, 입을 옷과 가방도 전날 밤 미리 챙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휴대전화 시계를 본 순간 명치 아래가 훅 꺼지고 손끝이 차가워졌습니다. 서둘러 가방을 들다가 차 열쇠를 떨어뜨렸고,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서야 지갑을 두고 온 것을 알아 다시 올라갔습니다.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서른여덟 살 여성분의 이야기입니다. 대학 동기 모임에도, 고객을 만나는 현장 미팅에도 번번이 십 분, 이십 분씩 늦었습니다. 일찍 준비했는데도 왜 시간이 부족했을까요? 늦었다는 것을 안 뒤에는 왜 더 허둥댔을까요?
그분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지각 자체보다 사람들의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웃고 넘기던 동기들도 이제는 "너는 원래 그렇잖아"라고 했습니다. 지각하는 이유를 검색하면 시간 관리를 못 하는 사람의 습관을 꼬집는 글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읽을 때마다 자신이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처럼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고 합니다.
성의가 없어서 늦는 것일까
어릴 때부터 시간 약속뿐 아니라 숙제 제출, 준비물 챙기기, 일의 마무리까지 두루 어려웠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성인 ADHD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ADHD의 신경발달 특성과 관련된 어려움이라면 전문적인 평가와 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분도 병원에서 평가를 받았고, ADHD로 진단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간 감각이 약한 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합니다.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까지 얼마나 흘렀는지, 남은 준비에는 얼마나 걸릴지를 가늠해야 합니다. 이런 시간처리에 어려움이 있으면 한 가지 일을 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놓칠 수 있습니다. 다음 준비로 넘어갈 때도 늦어지면서 조금씩 밀린 시간이 쌓입니다.
가끔 멈추는 벽시계를 보고 준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계만 보면 아직 여유가 있는데, 실제로는 출발할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흘러간 시간을 놓치거나 준비에 걸릴 시간을 짧게 잡으면, 일찍 시작하고도 마지막에는 쫓기게 됩니다.
늦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더 늦어진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시간을 가늠하는 어려움에 더해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고 늦었다는 걸 알면 그다음부터가 더 엉망이에요. 손은 빨라지는데 자꾸 뭘 떨어뜨리고, 챙긴 걸 또 확인하러 들어가요." 늦었다는 것을 안 뒤 실수가 늘면서 출발이 더 늦어졌습니다.
그분은 시계를 보자마자 명치가 꺼지고 손끝이 차가워졌습니다. 손은 급해졌지만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는 못했습니다. 실수가 이어지면 "나는 왜 늘 이럴까" 하며 자신을 탓했고, 그러는 사이 마음은 더 다급해졌습니다. 늦었다는 사실을 알아도 차분히 준비를 끝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알람을 다섯 개 맞춰도 남는 것
그분도 여러 방법을 써 보았습니다. 휴대전화에 알람을 다섯 개씩 맞추고, 달력에는 약속 시간을 삼십 분 앞당겨 적었습니다. 이런 방법은 시간을 짐작하는 데만 의지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성인 ADHD로 진단받은 분이라면 약물치료가 주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람이 제때 울려도 시계를 확인하는 순간의 당황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출발할 시간은 알아도 늦을 것 같을 때 허둥대는 일까지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번에는 침착하자"고 다짐해도 이미 손이 급해져 있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처럼 마음먹기 전에 나타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살펴봅니다. 시간을 정확히 가늠하는 능력 자체보다, 늦을 것 같을 때 느끼는 당황과 자책에 주목합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과 몸의 감각에서 시작해 함께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경험도 다룹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떨어진 벙어리장갑
그분과도 시계를 본 순간 명치가 꺼지던 느낌에서 시작했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자, 뜻밖의 겨울 아침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외투 지퍼를 아직 혼자 올리지 못하던 무렵입니다. 아파트 현관문은 열려 있고, 누나는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서 열림 단추를 누르고 있습니다. 아빠는 그 옆에서 "엘리베이터 잡아 놨다"고 부릅니다. 아이는 신발장 앞에 앉아 운동화에 발뒤꿈치를 밀어 넣습니다.
엄마가 두꺼운 외투를 들고 와 아이의 팔을 소매에 끼워 넣으며 재촉합니다. "너 하나 때문에 온 식구가 못 나가잖아. 빨리빨리 좀 해." 아이가 서두르자 외투 주머니에 있던 벙어리장갑 한 짝이 떨어집니다. 주우려고 숙이는 사이 털모자까지 벗겨집니다. 아이는 장갑과 모자를 번갈아 붙잡으며 더 허둥댑니다.
그날 가족이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또렷했던 것은 열린 문으로 들어오던 찬 공기와, 자기 때문에 모두가 기다린다는 부담이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신발장 앞의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직 혼자 신발을 신고 외투를 입는 일이 서툴러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가족을 일부러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니며, 장갑을 떨어뜨렸다고 자신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습니다. 그런 다음 신발을 신던 순간부터 같은 아침을 다시 겪었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온 식구가 못 나간다며 재촉했고, 장갑과 모자도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그 말을 들어도 명치가 예전처럼 꺼지지 않았고, 장갑을 주우려 숙일 때 손끝의 찬 기운도 덜했다고 합니다. 복도 끝의 아빠와 누나도 화가 났다기보다 그저 자신을 기다리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릴 때는 가족을 기다리게 한다는 부담에 장갑과 모자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늦었다고 느끼면 자신을 탓하며 서두르다 열쇠를 떨어뜨리고 지갑을 빠뜨렸습니다. 시간 감각이 약한 특성 자체를 이 아침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상담에서는 늦을 때마다 느끼는 부담과 허둥대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경험과 이어져 있을 가능성을 살폈습니다.
이십 분이 십 분으로 줄어든 토요일
요즘도 그분은 알람을 맞추고 약속 시간을 앞당겨 적어 둔다고 합니다. 달라진 것은 시계를 확인한 다음의 모습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도 머리를 말리다 출발 시간을 넘겼지만, 명치가 꺼지는 대신 숨을 한 번 고르고 가방부터 들었습니다. 열쇠를 떨어뜨리지 않았고,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문을 나서기 전에는 동기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 십 분 늦을 것 같아. 먼저 주문해 줘." 예전처럼 핑계를 길게 붙이지 않았고, 도착해서도 사과를 몇 번씩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이십 분쯤 늦을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십 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식당 의자에 앉고 나서야 오는 내내 자신을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일찍 준비해도 시계를 보는 순간부터 허둥댄다면, 시간 관리와 함께 늦었다는 생각 뒤에 시작되는 당황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알람은 그대로 활용하되, 서두르는 동안 무엇을 자꾸 빠뜨리는지 확인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