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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삼십 분 넘게 원하는 걸 설명하고 가세요. 저는 그동안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요.
그런데 문이 닫히고 나면 욕실 벽을 흰색으로 하자고 하셨는지 아이보리로 하자고 하셨는지가 생각이 안 나요.
듣는 내내 손바닥에 땀이 차서 볼펜이 미끄럽고, 가슴이 답답해서 몰래 숨을 크게 들이쉬어요.
딴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인테리어 업체에서 고객 상담을 맡고 있는 서른여섯 살 남성분의 이야기입니다. 대화에 집중이 안 되는 일이 되풀이되자, 그분은 상담 때마다 휴대전화 녹음을 켜 두기 시작했습니다. 저녁마다 녹음을 다시 들으며 놓친 내용을 받아 적느라 한 시간씩 걸렸다고 합니다.
팀장과 이야기할 때도 비슷했습니다. 지시를 듣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오면 무엇을 언제까지 하라는 건지가 흐릿했습니다. 다시 물으러 가기가 민망해서 옆자리 동료에게 슬쩍 확인한 날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상한 점도 있었습니다. 오래된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는 몇 시간을 떠들어도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기억났습니다. 남의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은 손님이나 팀장처럼 어려운 상대 앞에서였습니다.
대화를 놓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릴 때부터 수업을 듣거나 책을 읽을 때, 일을 순서대로 할 때도 주의가 자주 흩어졌다면 성인 ADHD 같은 주의력 특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먼저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잠이 모자라거나 우울과 불안이 심할 때도 대화 내용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려운 상대 앞에서 유독 집중하기 힘든 경우를 살펴봅니다. 평소에도 집중이 어렵고 긴장되는 대화에서 더 심해지는 분에게도 해당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대화 내용을 놓쳤을 때 머릿속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뭐라고 대답하지', '지금 이상해 보이지는 않나'를 생각하느라 상대의 말보다 자신의 대답과 모습에 신경이 쏠려 있었을 수 있습니다.
듣는 동안 대답을 먼저 짜고 있으면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면 방금 들은 내용을 잠시 기억하면서 다음 말과 연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쓰이는 것이 작업기억입니다. 한 번에 기억하며 처리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어, 다른 생각에 신경을 쓰면 들은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 답장을 써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답장에 쓸 말을 고르는 동안에도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들립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면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답장을 생각하느라 통화 내용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분도 상담 중에 비슷한 말을 꺼냈습니다. "손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저는 속으로 대답을 짜고 있더라고요. 견적 물어보시면 뭐라고 하지, 안 된다고 하면 싫어하시겠지, 그런 거요."
잘 대답하려고 미리 말을 고르는 동안, 정작 손님의 설명에는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녹음을 켜 두어도 되풀이되는 이유
메모와 녹음은 놓친 내용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어 실수를 줄이고 마음의 부담을 더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인 ADHD 진단을 받은 분이라면 처방받은 약이 주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분에게 녹음은 놓친 내용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손님 앞에서 느끼는 긴장까지 덜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녹음이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 봐도 손바닥은 여전히 젖었고, 손님의 설명이 끝나기 전에 대답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집중하자"고 다짐하다가 자신이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오히려 대화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분도 일부러 대답부터 준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상대가 입을 열면 어느새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음먹기 전에 되풀이되는 반응을 무의식 자동반응이라고 합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대답부터 준비하게 되는 긴장에 주목합니다. 그분과도 손님 앞에서 손바닥이 젖던 느낌에 집중하며 관련된 경험과 감정을 살펴봤습니다. 주의력 특성 자체를 바꾸기보다 대화를 더 어렵게 만드는 긴장을 다루는 과정입니다.
계산대 앞에서 속으로 되뇌던 말
최면이 깊어진 상태에서 손바닥의 축축한 느낌에 집중하자, 어린 시절 동네 가게의 계산대가 떠올랐습니다.
말을 제법 따라 하기 시작한 무렵입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온 가게에서 아이는 엄마 옆에 서서 계산 차례를 기다립니다. 줄에 서기 전부터 엄마는 여러 번 일렀습니다. "아저씨가 봉지 주시면 감사합니다, 꼭 말해야 해."
아이는 앞사람의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입속으로 그 말을 되뇝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틀리지 않으려고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은 계산대 위 봉지에서 떼지 않습니다. 그 사이 엄마가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말합니다. 엄마 목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이었는지는 머리에 남지 않습니다.
차례가 오고 아저씨가 봉지를 내밉니다. 아이는 봉지를 받자마자 "감사합니다" 하고 크게 말합니다. 가게를 나서는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 말을 제대로 했다는 생각만 남아 있습니다.
엄마가 그때 허리를 굽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최면 속에서도 끝내 들리지 않았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계산대 옆의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이가 꼭 쥔 두 손을 보며 말했습니다. "그 말은 조금 늦게 하거나, 작은 목소리로 해도 괜찮아. 아저씨는 네가 인사를 잘하는지 시험하고 있지 않아."
그 말을 전한 뒤 가게에서 보낸 몇 분을 처음부터 다시 겪었습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같은 말을 여러 번 일렀고, 아이는 입속으로 인사말을 되뇌다가 봉지를 받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두 손에 힘이 덜 들어갔고, 가슴이 조이지 않아 편하게 숨을 쉬었습니다. 속으로 '틀리면 안 돼' 하던 조바심도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그분의 주의력 문제 전체를 설명하는 원인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상담에서는 인사를 틀리지 않으려고 되뇌느라 엄마의 말을 놓쳤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손님 앞에서 잘 대답하려고 속으로 말을 준비하는 반응도 그때의 긴장과 이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보리가 벽 전체인지 묻던 날
상담 뒤 그분은 새로 찾아온 부부와 욕실 벽을 의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중간에 대답을 떠올리지 않고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한 가지만 물었습니다. "아이보리로 하자고 하신 게 벽 전체인가요, 허리 높이 아래만인가요?" 부인은 마침 그걸 말하려던 참이었다며 웃었다고 합니다.
메모장에는 손님이 한 말이 거의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녹음 파일을 다시 듣지 않아도 됐다고 합니다.
팀장이 새 현장 일정을 알려 줄 때도 달랐다고 합니다. 날짜 하나를 놓치자 "죄송한데 착공일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라고 바로 되물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와 옆자리 동료에게 슬쩍 물었을 일입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용을 놓쳤다면, 그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상대의 말보다 내가 할 대답을 먼저 고르고 있지는 않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