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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제 별명이 '걸어 다니는 달력'이에요. 거래처 신고 날짜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고요.
그런데 그 달력은 휴대전화 알람 서른두 개로 돌아가요.
주말이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나가서 한 주 동안 빠뜨린 걸 몰래 메웠고요.
요즘은 속이 쓰려서 위장약을 먹어야 잠이 들고, 오른쪽 눈 밑이 자꾸 파르르 떨려요."
상담실에서 이렇게 털어놓은 분은 세무회계 사무소에서 9년째 거래처 장부를 맡아 온 여성분입니다. 두 달 전, 서른다섯에 처음으로 성인 ADHD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진료실을 나와서도 한참 동안 병원 복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람과 주말 출근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왔습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뒤부터였습니다. 저녁 여섯 시면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야 했고, 주말 아침마다 나가던 빈 사무실에도 더는 갈 수 없었습니다.
몰래 메우던 시간이 사라지자 빠뜨린 일들이 하나둘 겉으로 드러났습니다. 거래처에 보낼 자료 요청 메일은 두 주 동안 임시 보관함에 머물렀고, 어린이집 소풍날에는 아이 가방에 도시락을 넣지 않아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날 어린이집 주차장에 세운 차 안에서 운전대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남들은 다 해내는 일을 왜 자기만 이렇게 힘겹게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검색창에 '여자 ADHD 특징'을 처음 넣어 본 것도 그날 밤이었습니다. 글을 읽을수록 학창 시절의 자기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수업 중 딴생각에 빠져 필기를 놓치면 쉬는 시간에 친구 공책을 빌려 옮겨 적었고, 준비물을 잊을까 봐 전날 밤 책가방을 몇 번씩 다시 쌌습니다. 성적이 괜찮았으니 그 수고를 눈치챈 어른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빈틈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자신이 ADHD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성인 여성 ADHD가 성실함에 가려질 때
일을 잘 해내는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ADHD에서는 할 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제때 하고, 여러 일의 순서를 정해 차례로 해 나가는 실행기능에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감을 잊거나, 하던 일을 두고 다른 일로 넘어가거나, 한 가지에 빠져 나머지를 놓치는 식입니다. ADHD는 뇌 발달과 관련된 신경발달장애에 속하므로 진단과 치료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늘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여성 ADHD에서는 부산하게 움직이기보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가거나 멍하니 딴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두드러지기도 합니다. 빠뜨린 것을 알람과 메모, 남보다 이른 준비로 메우면 오히려 성실하고 꼼꼼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물론 여성이라고 모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며, ADHD가 드러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무대 위에서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박자를 세는 사람은 객석에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춤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잘 해내도, 그 사람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그분에게는 알람 서른두 개와 주말의 빈 사무실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거래처 마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평일에 빠뜨린 일을 쉬는 날까지 확인하고 메웠습니다. 복직 뒤 그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자, 그동안 가려져 있던 어려움이 드러난 것입니다.
일이 이미 넘치는데도 누군가 도와주겠다고 하면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부터 나오시나요? 놓친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긴장이 피로를 더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ADHD를 판단할 수는 없으므로, 주의력의 어려움이 어릴 때부터 이어졌다면 전문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주의가 모여도 그대로였던 한 가지
진단 뒤 그분은 주치의가 권한 약을 먹기 시작했고, 흩어지던 주의가 한결 모였습니다. 오후만 되면 같은 장부를 몇 번씩 다시 들여다보던 일이 줄었고, 전화를 받다가 하던 입력을 잊어버리는 일도 드물어졌습니다.
그래도 빠뜨린 일을 알아챘을 때의 반응은 그대로였습니다. 한 거래처의 증빙 자료를 요청하지 않은 것을 마감 사흘 전에 알게 된 날, 속이 뒤틀리듯 쓰려 왔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아이를 재운 뒤 식탁에 노트북을 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했습니다.
그분은 이제 혼자 다 떠안지 말자며 휴대전화 잠금 화면에 '혼자 하지 말기'라고 적어 두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실수를 알아챘을 때는 도움을 청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혼자 수습하려 했습니다. 화면에 적어 둔 다짐만으로는 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처럼 실수를 알아챘을 때 나타나는 무의식 자동반응에 주목합니다. 그 순간의 감정과 몸의 느낌에 집중하며, 함께 떠오르는 경험을 살펴봅니다. 그분도 진단과 약물치료는 병원에서 이어 가면서, 상담에서는 빠뜨린 일을 혼자 감추고 메우게 되는 반응을 다뤘습니다.
엄마를 부르지 않고 닦은 식탁
그분과도 자료를 빠뜨린 걸 알아챈 날의 쓰린 속에서 시작했습니다. 최면이 깊어지며 그 느낌에 집중하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어 아침 햇빛이 드는 식탁과 그 앞에 앉은 작은 여자아이가 보였다고 합니다.
식탁 의자에 앉은 아이는 아직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어야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는 동생을 한 팔에 안은 엄마는 몸을 흔들어 달래며, 다른 손으로 가스레인지 불을 줄입니다. 아이가 컵을 내려놓으려다 그만 놓치고 맙니다. 쏟아진 물이 식탁을 타고 흘러 아이 무릎까지 적십니다.
아이는 숨을 멈추고 배에 힘을 준 채 엄마 등을 바라봅니다. 동생을 달래느라 바쁜 엄마에게 물까지 쏟았다고 말하기가 미안합니다. 아무 말 없이 의자에서 조심조심 내려와 싱크대 앞에 걸린 행주를 끌어내립니다. 까치발을 하고 식탁을 문지르는 동안 소매 끝이 젖어 팔에 달라붙습니다. 동생을 어르던 엄마가 돌아보더니 웃습니다. "넌 혼자서도 알아서 잘하니까 엄마가 참 편하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이 배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립니다.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고 혼자 해냈다는 생각에 안심합니다. 우유를 흘린 날에도, 단추를 어긋나게 끼운 날에도 아이는 누구도 부르지 않고 혼자 해결했고, 그때마다 비슷한 칭찬을 들었습니다.
장면을 이야기하던 그분이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혼나는 장면이 나올 줄 알았어요. 칭찬받던 아침일 줄은 몰랐네요."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물이 쏟아진 순간의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엄마가 바빠 보여 부르기 미안했던 마음을 알아주며 말했습니다. "컵이 아직 네 손에 커서 놓친 거야. 엄마가 바빠 보여도 필요하면 불러도 돼." 엄마가 편하다고 말한 것이 혼자 해내야만 사랑받는다는 뜻은 아니라고도 전했습니다.
그 이해를 가지고 같은 아침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물은 다시 쏟아졌고 동생도 계속 울었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아무도 부르지 않은 채 행주를 가져와 식탁을 닦았고, 엄마의 칭찬도 똑같이 들려왔습니다. 다만 손이 전처럼 서두르지 않았고, 엄마 등을 힐끔거리는 대신 물기가 줄어드는 식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칭찬이 들려오기 전부터 아이의 배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물 한 컵을 쏟은 아침이 ADHD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엄마의 칭찬 자체를 잘못으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상담에서는 실수하면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혼자 수습한 뒤에야 안심하던 마음을 살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 했고, 지금은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무도 모르게 일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빨간 글씨 옆에 적은 후배의 이름
상담 뒤, 종합소득세 신고로 사무실이 가장 바쁜 달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셨습니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서 그분은 휴대전화 알람으로만 챙기던 거래처 마감을 팀 공용 일정표에 올렸습니다. 아직 자료를 받지 못한 거래처 여섯 곳도 빨간 글씨 그대로 두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입사 2년 차 후배가 빨간 글씨 두 줄을 가리키며, 이 두 곳은 자기가 연락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상담을 받기 전의 그분이었다면 괜찮다며 웃고, 그날 밤 아이를 재운 뒤 혼자 메일을 보냈을 겁니다. 이번에는 그 두 줄 옆에 후배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 주 토요일에는 주말 아침마다 울리던 알람을 모두 꺼 두었습니다. 아침에는 빈 사무실 대신 부엌에서 아이와 김밥을 말았고, 도시락을 챙겨 동네 공원으로 둘만의 소풍을 나갔습니다. 돗자리에 앉은 아이가 김밥 꽁다리부터 집어 먹는 모습을 그분은 한참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주변에서는 잘 버틴다고 해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메우는 동안 본인은 지칠 수 있습니다. 진료와 생활 도구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모든 일을 혼자 떠안는다면, 실수 앞에서 어떤 마음이 먼저 드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