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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거 뭐였죠? 요즘 다들 본다는 그 드라마요. 방금까지 혀끝에 걸려 있었는데…. 잠깐만요, 금방 생각날 거예요.”
아파트 상가에서 열두 해째 미용실을 운영하는 마흔두 살 여성분이 손님 머리를 자르다가 한 말입니다. 가위를 든 손은 허공에 멈춰 있었고, 결국 거울 속 손님이 먼저 제목을 말해 주었습니다. 둘이 같이 웃고 넘어갔지만, 그 순간 이마 안쪽이 묵직하게 눌려 오고 눈앞이 한 겹 뿌옇게 흐려졌다고 합니다.
그런 순간은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오후 세 시가 넘으면 예약 장부의 손님 이름을 두세 번 읽어야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저녁에 남편에게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도 말이 중간에서 끊겨, “아니다, 됐어” 하고 입을 닫는 날이 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마흔 넘으면 다 그렇다고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그 몇 초가 그분에게는 무서웠다고 합니다.
휴대전화로 증상을 찾아보다가 브레인포그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됐고, 동네 내과에서 혈액검사도 받았습니다. 결과는 모두 괜찮았습니다. 잠이 모자란가 싶어 한동안 밤 열한 시면 불을 끄고 누웠지만, 가게를 쉬는 월요일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도 머리는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는 결과지를 받고 나니 오히려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막막해졌습니다.
최면상담에서 떠오른 오래전 오후에는 방바닥에 늘어놓은 동물 그림 카드가 있었습니다. 미닫이문 너머 부엌에서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잦아들었습니다. 그 오후와 지금의 어려움은 어떻게 이어져 있었을까요? 먼저 머리가 흐려지던 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흐린 날을 달력에 적어 보니
브레인포그는 병 이름이 아닙니다. 머리가 멍하고 생각이 느려지며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 상태를 두루 부르는 말입니다. 잠이 모자라거나 몸에 병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고, 복용하는 약이나 우울감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브레인포그 치료는 원인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증상이 갑자기 심해지거나 일상을 꾸리기 어려울 만큼 이어진다면 진료를 먼저 받아 보셔야 합니다.
검사 결과를 받은 뒤 그분은 두 주 동안 머리가 유난히 흐린 날을 가게 달력에 동그라미로 표시해 보았습니다. 잠을 설친 날에 동그라미가 몰려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표시된 날은 말끝마다 불만을 내비치던 손님이 다녀간 날, 직원 둘이 서로 말을 섞지 않던 날, 남편이 말없이 저녁을 먹던 날이었습니다.
샤워기를 끝까지 돌려도
그분은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이야기했습니다. “가위질은 손이 알아서 해요. 그런데 손님 얼굴이 조금만 굳어도, 뒤에서 직원이 저를 부르기만 해도 하던 말이 뚝 끊겨요.” 손에 익은 가위질은 해내는데, 주변 기색이 달라지면 하던 말을 잇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주변에 별다른 일이 없어도 긴장이 가라앉지 않는 상태를 설명할 때 ‘과각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겉으로는 가만히 있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움직일 채비를 하는 것입니다. 브레인포그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긴장이 계속되면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오래된 집에서 샤워를 하다 보면 부엌에서 누가 설거지를 시작하는 순간 물줄기가 갑자기 가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샤워기 꼭지를 끝까지 돌려도 물줄기가 좀처럼 굵어지지 않습니다. 부엌의 수도가 잠겨야 다시 시원하게 쏟아집니다.
주변을 살피느라 긴장할 때도 이와 비슷한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손님의 표정과 가게 안 기척에 자꾸 주의가 쏠리면, 하려던 말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이어 가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 “정신 차려야지”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은 샤워기 꼭지만 더 돌리는 일과 닮았습니다.
그분도 머리를 맑게 하려고 여러 방법을 써 보았습니다. 오후마다 믹스커피를 두 잔씩 마셨고, 기억력에 좋다는 영양제도 챙겼습니다. 계산대 옆에는 단골손님 이름과 염색약 배합을 적은 메모지를 붙였습니다. 커피는 한두 시간 정신을 깨워 주었고, 메모는 떠오르지 않는 이름을 대신 알려 주었습니다.
잠이 모자랐다면 잠을 늘리고, 몸에 병이 있다면 그 병을 치료하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그분은 잠을 늘리고 커피와 메모에도 기대 보았지만, 사람들의 기색이 달라질 때마다 긴장하는 일은 여전했습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하던 말이 끊겨 있어,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는 어려웠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런 무의식 자동반응을 살펴봅니다. 그분과도 말이 끊길 때 느껴지는 긴장에서 출발해, 함께 떠오르는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다뤘습니다.
기린 목의 점을 짚던 손가락
상담에서 그분은 손님 앞에서 말이 끊기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혀가 입천장에 딱 붙은 채 굳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깊은 최면으로 몸이 한결 가라앉은 뒤에도 입안의 그 뻣뻣함은 그대로였고, 거기에 주의를 모으자 오래된 방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린을 ‘기닌’이라고 부르던 무렵입니다. 부엌과 미닫이문 하나로 나뉜 작은 방에서 아이가 장판 위에 동물 그림 카드를 늘어놓고 앉아 있습니다. 아이는 기린 카드를 집어 들고 목에 난 갈색 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 갑니다. 문 너머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무언가로 다투는 목소리가 낮게 이어지다가 한 번씩 확 커집니다. 그때마다 손가락이 멈추고, 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들어 미닫이문을 봅니다.
“막내야, 빨래집게 좀 갖다줘!” 베란다에서 큰언니가 부릅니다. 아이는 카드를 내려놓고 빨래집게 통을 찾아 베란다에 가져다줍니다. 다시 앉아 기린 카드를 집으면 이번에는 오빠가 양말을 찾습니다. 서랍에서 양말을 꺼내 주고 돌아오면 문 너머 목소리가 또 커집니다. 카드를 보고 있어도 귀는 식구들 쪽으로 향합니다. 또 소리가 커지거나 누가 부를까 신경이 쓰여, 어느 점까지 짚었는지 놓치고 첫 번째 점부터 다시 짚습니다.
그분은 장판 위 어린 자신 곁에서 같은 카드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문 너머 목소리에 놀라고, 누가 부를지 몰라 마음 놓고 놀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었습니다. 어른들이 다투는 것이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라고 전했습니다. 또 카드에 집중하고 있어도 누가 부르면 들을 수 있으니, 계속 귀를 기울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이해를 가지고 카드를 늘어놓던 오후를 다시 경험했습니다. 문 너머 목소리는 여전히 커졌고, 아이는 이번에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언니가 빨래집게를, 오빠가 양말을 찾을 때도 똑같이 일어나 다녀왔습니다. 다만 고개를 들었다 내릴 때마다 꼭 다물던 입에 힘이 덜 들어갔고, 첫 번째 점으로 돌아간 손가락은 서두르지 않고 다시 점을 짚어 나갔습니다.
장면이 끝나 갈 무렵, 그분은 입천장에 붙어 있던 혀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눈을 뜬 뒤에는 입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입안이 넓어진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브레인포그가 모두 그 오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식구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짚던 점을 놓쳤고, 지금의 그분은 손님의 표정이나 직원의 부름에 긴장하면서 하던 말이 끊겼습니다. 상담에서는 이처럼 주변을 계속 살피던 마음과 몸의 긴장을 함께 다뤘습니다.
드라마 이야기를 먼저 꺼낸 날
그 손님이 다시 머리를 하러 온 날, 드라마 이야기를 먼저 꺼낸 쪽은 그분이었다고 합니다. 제목은 물론이고 지난주 마지막 회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가위를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 손님이 결말을 두고 다른 예상을 내놓자 웃으며 자기 예상을 끝까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들어온 지 반년 된 신입 직원에게 커트를 가르치는 일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설명하다 말이 끊길까 봐 그동안은 “보고 따라 해” 하며 시범만 보였는데, 요즘은 가위를 드는 각도부터 머리카락을 나누는 순서까지 말로 풀어 가며 가르친다고 합니다.
저녁에는 남편에게 그날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끝까지 이야기하고, 까다로운 손님이 다녀간 날에도 이마 안쪽이 눌려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잠에서 깼을 때 머리가 개운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던 말을 “아니다, 됐어” 하고 접으셨다면, 그 순간 누구의 표정과 목소리를 살피고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쉬는 날에도 주변 기색을 살피느라 긴장을 풀기 어렵다면, 눈앞의 대화보다 주위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반응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