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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병원 좀 같이 가 줘. 아무래도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동네에서 스무 해째 세탁소를 하는 쉰두 살 남성분이 어느 저녁 아내에게 전화로 한 말입니다.
그날 오후 그분은 단골손님의 흰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고, 화면에 아버지가 계신 요양병원 번호가 떴습니다. 번호를 보는 순간 윗배가 돌처럼 단단하게 뭉쳤습니다. 전화를 받으며 가게 밖으로 나가는 동안 다리미는 셔츠 등판 위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통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가게 앞에 서 있었는데, 그동안 다리미 생각은 한 번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탄내를 맡고 뛰어들어갔을 때 셔츠 등판에는 다리미 모양 그대로 누런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코드를 뽑으려는데 손이 떨려 플러그가 한 번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무릎에 힘이 풀려, 한동안 작업대를 짚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스무 해 동안 손님 옷을 태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돌아보니 요즘 들어 깜빡하는 일이 부쩍 잦았습니다. 가게 문을 잠갔는지 생각나지 않아 집 앞에서 되돌아간 밤이 있었고, 아내가 부탁한 두부는 벌써 세 번째 잊었습니다. 친구들은 쉰 넘으면 누구나 오는 건망증이라며 웃었지만, 그분에게는 그 말이 위로보다 경고처럼 들렸습니다.
셔츠를 태운 다음 주, 그분은 아내와 함께 신경과를 찾아 기억력 검사를 받았습니다. 나이에 맞는 범위라는 설명을 듣고 병원을 나설 때는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에만 손에 쥔 휴대전화를 찾느라 가게를 뒤진 일이 두 번이었습니다. 검사가 괜찮다는데 왜 이렇게 자꾸 잊는 걸까요?
통화는 또렷한데 다리미만 비어 있던 오후
상담에서는 그분과 함께 그날 오후를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습니다. 간호사가 한 말은 거의 그대로 기억했습니다. 아버지가 밤새 열이 올라 내일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가게 앞 전봇대에 기대 서 있던 것도, 셔츠를 칼라부터 다리기 시작한 것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미를 어디에 두고 나왔는지는 떠오르지 않았고, 통화가 끝나도록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잊었고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깜빡임을 살펴볼 단서가 됩니다. 하루의 흐름은 또렷한데 걱정에 마음을 빼앗긴 순간의 행동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때 하던 일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차이만으로 원인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누가 짚어 줘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떠오르지 않거나 깜빡임이 갈수록 잦고 심해진다면, 병원에서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진 찍는 순간 딴 데를 보던 카메라
그분은 왜 통화 내용은 기억하면서 손에 들었던 다리미는 잊었을까요? 걱정거리에 대비하느라 몸과 마음의 긴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상태를 과각성이라고 합니다. 긴장한 채 걱정거리에 몰두하면 눈앞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모든 깜빡임이 여기서 비롯되지는 않지만, 걱정이 많은 시기에 유독 잦아진다면 함께 살펴볼 만합니다.
어떤 일을 나중에 떠올리려면 그 일을 할 때부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메라를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사진을 찍었다면, 사진첩을 아무리 넘겨도 원하던 장면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에 몰두하느라 하던 일을 기억에 충분히 담지 못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다리미를 내려놓을 때 벌써 머릿속은 아버지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 그분의 말처럼 손으로는 셔츠를 다리고 있었어도, 마음은 이미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메모지가 늘수록 커지던 걱정
그분도 깜빡임을 줄이려고 여러 가지를 해 보았습니다. 작업대 위 벽에 메모지를 붙이고, 가게 문 닫을 시간에는 휴대전화 알람을 맞췄습니다. 아내가 사 온 영양제도 빠짐없이 챙겨 먹었습니다. 메모와 알람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가게 문을 잠갔는지 확인하러 되돌아가는 밤도 알람을 맞춘 뒤 조금 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밀려오는 순간에는 메모를 살펴보기도 전에 그쪽으로 주의가 쏠렸습니다. 깜빡할 때마다 치매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더해져, 하던 일에 마음을 두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메모지가 한 장 늘 때마다 제가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았어요."
그분에게는 메모를 늘리는 것과 함께 살펴볼 일이 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소식만 들으면 곧바로 긴장하며 하던 일을 놓쳤습니다. 이런 무의식 자동반응은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 쉽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순간의 감정과 몸의 느낌에 집중하며 함께 떠오르는 경험을 다룹니다.
장롱 밑으로 굴러간 노란 구슬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분은 병원 번호를 볼 때 돌처럼 굳던 윗배의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오른손도 윗배에 올려놓았습니다. 잠시 뒤 뜻밖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구슬이요, 제가 구슬을 꿰고 있어요. 이게 왜 떠오르죠?"
신발을 좌우 바꿔 신고도 모르던 무렵입니다. 저녁을 먹고 난 작은방 바닥에서 아이가 굵은 나무 구슬을 끈에 꿰고 있습니다. 빨강 다음에 노랑, 그다음은 다시 빨강입니다. 엄마 목에 걸어 줄 목걸이입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시골에 사는 이모가 들어옵니다. 이모는 신발을 벗다 말고 엄마 손을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언니, 엄마가 수술을 받으셔야 한대." 아이의 외할머니 이야기입니다. 부엌에 있던 아빠까지 나와, 세 어른이 작은방 문 앞에 선 채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아이는 노란 구슬 하나를 쥔 채 손을 멈춥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납니다. 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고 싶어 엄마와 이모의 얼굴을 번갈아 올려다봅니다. 윗배가 딱딱하게 뭉쳐 옵니다.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끈 끝이 손가락에서 빠집니다. 꿰어 둔 구슬들이 하나둘 미끄러져 장롱 밑으로 굴러가지만 아이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한참 뒤 고개를 숙이고서야 빈 끈과 손에 쥔 노란 구슬을 멍하니 내려다봅니다. 그러고는 다시 어른들이 서 있는 문 쪽을 봅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아이 뒤에 앉아 작은 등에 손바닥을 댔습니다. 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 어른들만 바라보는 어린 자신에게 그 저녁 듣지 못했던 설명을 전했습니다. "외할머니가 아프셔서 어른들이 걱정하는 거야. 수술은 잘 끝나고, 여름에는 우리 집에 오셔서 너랑 수박도 드셔."
그 설명을 들은 뒤 같은 저녁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이모는 신발을 다 벗기도 전에 엄마 손을 잡았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손을 멈추고 어른들을 올려다봤고, 구슬들도 장롱 밑으로 굴러갔습니다. 이번에는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 이해했고, 외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윗배가 돌처럼 굳지 않았고, 손에 남은 노란 구슬의 동그랗고 매끈한 느낌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경험한 뒤 윗배에 얹었던 손이 무릎으로 내려왔습니다. 눈을 뜬 뒤에는 늘 뭉쳐 있던 윗배가 풀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구슬과 지금의 다리미는 달랐지만,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면 윗배가 굳고 하던 일을 놓치는 모습은 닮아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그때 느낀 두려움과 지금 반복되는 긴장을 함께 다뤘습니다.
다리미를 세워 두고 받은 전화
상담 뒤에도 다림질 중에 요양병원 번호가 뜨는 날은 있었습니다. 지난주에는 다리미를 받침대에 세우고 스위치를 내린 다음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검사를 한 번 더 받게 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번호를 볼 때 윗배가 잠깐 뻐근했지만 통화를 마칠 즈음에는 풀렸습니다. 가게로 돌아와서는 다리다 만 소매부터 이어서 다렸다고 합니다.
그분은 올해 동네 상인회 총무도 맡게 됐다고 합니다. 예전에 같은 부탁을 받았을 때는 날짜와 회비를 깜빡할까 봐 손사래를 쳤습니다. 이번에는 첫 모임 날짜를 단체 대화방에 제때 올렸고, 걷은 회비도 그날 저녁 장부에 옮겨 적었습니다. 아내가 부탁한 두부를 잊은 날에도 치매부터 떠올리지 않고, 다음 날 퇴근길에 사 들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오늘 무언가를 깜빡하셨다면, 그때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