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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아홉 시에 앉았는데 벌써 열두 시야.
해 놓은 걸 보니 삼십 분이면 할 양이더라. 휴대전화는 한 번도 안 만졌어.
모니터만 보고 있었는데 일어나려니까 어금니가 뻐근하고 어깨가 돌덩이 같아.”
공작기계 사용 설명서를 번역하는 마흔한 살 프리랜서 번역가가 같은 일을 하는 선배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십 년 넘게 해 온 일인데, 검수가 까다로운 거래처를 맡은 뒤로는 오래 앉아 있어도 남는 원고가 부쩍 적어졌다고 했습니다. 마감 전날이면 새벽까지 노트북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휴대전화도 멀리한 세 시간 가운데 두 시간 반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되찾으려면 무엇을 다뤄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그날 오전 그분은 한 문장을 옮길 때마다 앞 문단으로 올라가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이미 잘 아는 용어도 직접 만든 용어집을 열어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같은 문장을 어미만 바꿔 다섯 번 고쳐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내내 책상 밑의 두 발은 뒤꿈치가 들린 채였다고 합니다.
점심때 의자에서 일어서자 눈이 따끔거리고 머리는 열이 오른 것처럼 멍했습니다. 온종일 일한 날보다 더 지쳐 있었는데, 화면에 남은 원고는 스무 줄 남짓이었습니다.
그분은 집중력 높이는 법을 다룬 글을 찾아 읽고 여러 방법을 따라 해 보았습니다. 도서관에 나가 일해 보았고, 커피를 하루 두 잔으로 늘렸고, 휴대전화는 서랍에 넣었습니다. 집중한 시간을 재 주는 앱도 깔았습니다. 그날 오전 앱에는 ‘집중 3시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를 한 번도 들지 않았으니 앱으로서는 틀린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출퇴근이 없는 프리랜서라 느슨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도 스스로 게을러졌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세 시간 동안 딴짓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세 시간 가운데, 나머지 두 시간 반은 어디로 간 걸까요?
두 시간 반은 무엇에 쓰였을까
그분은 번역하는 동안에도 방금 쓴 문장이 틀리지 않았는지 계속 살폈습니다. 몸과 머리가 무언가에 대비하며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고 긴장된 상태를 과각성이라고 합니다. 일에 집중하려 해도 자신이나 주변을 살피는 데 자꾸 주의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번역을 이어 가는 시간보다 이미 옮긴 문장을 확인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수영장에서 자유형을 막 배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팔을 몇 번 젓다가 방향이 맞는지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다시 몇 번 젓고 또 고개를 듭니다. 고개를 들 때마다 다리가 가라앉아 몸은 더 무거워집니다. 물속에서 내내 애를 쓰는데도 레인 끝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오전도 그랬습니다. 세 줄을 옮기고 앞 문단으로 올라가 다시 읽었고, 두 줄을 더 옮기고 용어집을 열었습니다. 확인할 때마다 어금니를 물고 뒤꿈치를 들었으니, 세 시간 뒤 몸이 먼저 지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블로그 번역은 술술 넘어가던 저녁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취미로 번역하던 저녁에는 달랐습니다. 블로그에 올릴 원고는 몇 쪽이 금세 넘어갔고, 앞 문단으로 돌아가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마감에 밀려 취미 번역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합니다. 유독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은 누군가 검토할 원고를 쓸 때였습니다.
타이머로 일과 휴식을 나누고, 알림을 끄고, 책상을 치우면 일을 시작하기가 한결 쉬워지고 바깥에서 끼어드는 방해도 줄어듭니다. 그분도 이런 방법을 써 보았지만, 알림 하나 없는 조용한 곳에서도 방금 쓴 문장을 몇 번씩 되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앞 문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분도 모니터 옆에 ‘다시 읽지 말 것’이라고 적은 쪽지를 붙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면 스크롤은 이미 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다시 읽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어느새 같은 문장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처럼 마음먹은 것과 달리 되풀이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살펴봅니다. 그분과도 일할 때 어금니에 들어가는 힘을 실마리로 삼아, 그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감정을 다뤘습니다.
거실 바닥의 나무 퍼즐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뒤, 그분은 원고 앞에서처럼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시절 집의 거실 바닥이 떠올랐습니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장판 위까지 길게 비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아직 양말을 신지 못하던 무렵의 아이가 거실 바닥에 앉아 나무 퍼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무판에는 토끼와 오리, 강아지 모양의 홈이 파여 있고, 조각마다 작은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아빠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아이의 손을 내려다봅니다.
아이가 조각을 집을 때마다 아빠가 말합니다. “잘 보고 넣어, 틀리면 처음부터 또 해야 돼.” 아이는 토끼 조각을 든 채 아빠 얼굴을 올려다보고, 다시 자기 손을 내려다봅니다. 토끼를 오리 홈에 넣자 아빠가 조각을 빼내며 짧게 말합니다. “다시.”
그 뒤로 아이는 조각을 넣기 전마다 손을 멈추고 아빠 얼굴을 살핍니다. 또 틀리면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말이 신경 쓰입니다. 이를 꽉 물고 손잡이를 쥔 손가락 끝이 하얘질 만큼 힘을 줍니다. 어느 홈에 맞을지 이리저리 대 보기보다, 넣으려는 곳이 맞는지 자꾸 확인합니다.
최면 속에서 마흔한 살의 그분은 소파 반대쪽, 퍼즐판 건너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손잡이를 꼭 쥔 아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건 시험이 아니야. 노는 거야. 퍼즐은 여기도 넣어 보고 저기도 넣어 보면서 맞추는 거야.”
그런 다음 햇빛이 비치던 그 오후를 한 번 더 겪었습니다. 아빠는 이번에도 “틀리면 처음부터 또 해야 돼”라고 했습니다. 토끼 조각은 똑같이 오리 홈에 들어갔고, 아빠는 조각을 빼며 “다시”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가 이를 물지 않았고,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서도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빠 목소리에 잠깐 움찔했지만, 눈은 곧 홈 안의 토끼 귀 모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날 퍼즐을 끝까지 다 맞췄는지, 아빠가 언제 소파에서 일어났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지켜보는 퍼즐 앞에서나 거래처가 검토할 원고 앞에서나, 틀리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고 자꾸 확인하는 반응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괄호를 치고 넘어간 오전
요즘 그분은 확신이 서지 않는 용어가 나오면 괄호를 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오전에는 앞 문단으로 돌아가지 않고 초벌 번역을 끝까지 이어 갑니다. 오후에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괄호로 남겨 둔 용어를 한꺼번에 확인합니다. 지난주에는 열한 시 반에 챕터 하나를 다 옮기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고 합니다. 일어서기 전 내려다보니 책상 밑의 발뒤꿈치가 바닥에 붙어 있었고, 어금니도 뻐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마감 전날마다 새벽까지 켜 두던 노트북은 요즘 저녁 먹기 전에 덮는다고 합니다. 오래 쉬던 추리소설 블로그에도 다시 새 번역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휴대전화에는 지금도 집중한 시간을 재는 앱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오전 세 시간이 찍히는 것은 전과 같지만, 그 세 시간 뒤 화면에 남는 원고의 양이 달라졌습니다.
오래 앉아 있었는데 남은 일이 적다면, 일어설 때 몸 어디가 뻐근한지도 살펴보세요. 틀리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주고 같은 문장을 확인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다루면, 책상 앞의 시간을 실제로 일을 이어 가는 시간에 가깝게 바꿀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