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당신, 아까 경비실 앞에서 옆집 여자랑 무슨 얘기 했어? 내가 어젯밤에 당신한테만 한 말을 그 집에서 벌써 알고 있더라."
구청 민원실에서 스물두 해째 일하는 쉰일곱 살 남성분이 밤 열한 시가 넘어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그분은 불 꺼진 거실에서 커튼 끝을 손가락으로 조금 벌린 채 서 있었습니다. 며칠째 새벽 세 시만 되면 눈이 떠져 현관문 구멍으로 복도를 내다보았고, 어금니를 하도 악물어 턱이 욱신거렸습니다. 저녁밥은 몇 숟가락 뜨다 말았고, 명치가 늘 꽉 막힌 것 같았다고 합니다.
아내가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지난봄이었습니다. 남편은 집 안에서도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고,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면 텔레비전 소리부터 키웠습니다. 휴대전화는 전원을 끈 채 수건에 싸서 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부부가 "요즘 야근이 많으신가 봐요" 하고 인사한 날부터였습니다. 전날 밤 아내에게 야근 이야기를 했던 남편은 집에서 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민원인에게 웃으며 서류를 떼어 주었고, 동창 모임에서도 평소처럼 농담했습니다. 아내는 밤마다 검색창에 ‘망상’이라는 단어를 넣어 보면서도 한동안 자신이 예민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밖에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집에서만 달라질 때, 가족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진료로 이어 줄 수 있을까요?
밖에서는 멀쩡해 보이던 사람
망상장애는 사실이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 곧 망상이 한 달 이상 이어지는 정신질환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거나 배우자가 외도한다거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처럼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내용이 많습니다. 망상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직장생활과 일상은 비교적 유지되는 경우가 있어 바깥사람들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합니다. 가족이 가장 먼저, 때로는 혼자서 변화를 지켜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내가 본 변화도 그랬습니다. 남편의 의심은 늘 한 가지로 모였습니다. 집에서 한 말이 옆집과 관리사무소로 새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관리사무소에 직접 물어보고 아무 일도 없다는 답을 전하면, 남편은 곧 다른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증거는 바뀌어도 결론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가늠해 볼 단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나 가끔은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하나를 풀어 주면 또 다른 증거를 찾고 결론은 늘 같다면 흔한 오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의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집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까지 달라졌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진단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내립니다. 의심과 생활의 변화가 이어진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평가받는 것이 좋습니다.
따질수록 멀어지던 대화
처음에 아내는 사실을 하나하나 짚었습니다. 옆집은 주차장에서 늦게 들어오는 차를 보고 인사한 것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럴수록 남편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어느 날은 아내를 빤히 쳐다보며 "당신도 그 집이랑 말 맞췄지?" 하고 물었습니다. 의심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번진 것입니다.
남편에게 그 의심은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밤마다 명치가 조여 잠을 설칠 만큼 생생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럴 때 논리로 반박하면 방어가 커지고 확신이 더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집이 좀 이상하긴 하네" 하고 맞장구치면 그 믿음이 강화될 수 있습니다. 망상의 내용에 동의하거나 따지기보다, 당사자가 느끼는 불안과 괴로움에 반응하는 편이 도움이 됩니다.
아내는 대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옆집 이야기가 나오면 "요즘 정말 마음이 불안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남편 스스로도 괴로워하던 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신 요즘 새벽마다 깨잖아. 잠이라도 좀 자게 같이 병원에 가 보자." 남편은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남편은 망상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약을 먹기 시작했고, 정해진 날마다 주치의와 면담했습니다. 치료를 이어 가면서 새벽에 깨는 날이 줄었고, 어느 저녁에는 "옆집이 그걸 알 리는 없겠지" 하고 먼저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처방받은 약을 정해진 때에 먹도록 함께 챙겼다고 합니다.
말소리만 들리면 먼저 굳던 몸
그런데 한 가지 반응은 남았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둘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거나 아내가 부엌에서 통화하며 웃으면, 몸이 먼저 굳었습니다. 얼굴이 귓불까지 화끈 달아오르고 목이 조여 오면 손에 든 것을 내려놓은 채 한참 서 있었습니다. "머리로는 아닌 줄 알아요. 그런데 몸이 먼저 ‘또 내 얘기구나’ 하고 굳어 버려요."
남편은 주치의와 상의한 뒤 이 반응을 다뤄 보고 싶다며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약은 그대로 복용하면서, 말소리를 들을 때 얼굴과 목이 먼저 굳는 반응을 따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망상장애의 원인은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으며, 뇌의 요인과 스트레스 등 여러 조건이 함께 거론됩니다. 이 상담도 어린 시절 경험 하나로 망상장애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치료 뒤에도 사람을 믿기 어렵고 몸이 먼저 긴장하는 반응이 남아 있어, ‘사람은 결국 나를 속이거나 해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불신·학대 도식을 하나의 관점으로 참고했습니다. 이는 남아 있는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개념이지, 망상장애의 원인을 단정하는 설명은 아닙니다.
휴대전화의 자동 고침 기능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자주 쓰던 말이 저장되어 있으면 비슷한 글자를 치는 순간, 사용자가 고르기도 전에 그 말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분도 이웃의 인사나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내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는 해석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한 뒤에도 비슷한 상황이 오면 몸부터 긴장했습니다.
치료로 확신이 누그러진 뒤에도 몸은 생각보다 먼저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분도 얼굴이 달아오른 다음에야 ‘아니야’ 하고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상담은 얼굴의 화끈거림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감각과 함께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당시의 감정을 차례로 살펴봤습니다.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아침
그분은 깊은 최면에 들어 호흡이 한결 느려진 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의 낮은 말소리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얼굴이 금세 귓불까지 붉어졌습니다. 그 화끈거림에 한동안 머물자 뜻밖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만두를 빚고 있어요. 큰엄마가 와 계시네요."
장면 속 아이는 밤에 이불을 적시는 일이 아직 가끔 있던 나이였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이불이 젖어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불을 걷어 내자 아이는 엄마 귀에 대고 작게 말했습니다. "엄마, 큰엄마한테 말하지 마. 누나한테도." 엄마는 웃으며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었습니다.
오후에는 큰엄마와 사촌 누나가 왔습니다.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모두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습니다. 아이는 엄마 옆에 붙어 앉아 만두피 끝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붙였습니다. 그때 큰엄마가 베란다 쪽을 보며 물었습니다. "아침부터 웬 이불 빨래야?"
"얘가 글쎄 어젯밤에 또 지도를 그렸잖아." 엄마가 웃으며 대답하자 큰엄마가 소리 내어 웃었고, 사촌 누나는 "아직도?" 하며 아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이의 손이 만두피 위에서 멈췄습니다. 얼굴이 귓불까지 뜨거워지고 목이 꽉 막혔습니다.
아이는 빚던 만두를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저녁에 엄마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새끼손가락을 주먹 안에 꼭 접어 넣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문을 닫고 들어간 아이를 따라 안방으로 갔습니다. 벽에 기대앉은 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엄마와 한 약속을 믿었는데 모두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아 얼마나 창피하고 서운했을지 먼저 알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며, 엄마를 믿고 말한 것도 잘못이 아니라고 전했습니다.
그 말을 전한 뒤,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아침부터 같은 하루를 다시 경험했습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큰엄마 앞에서 이불 이야기를 했고 웃음소리가 났습니다. 아이는 만두를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목이 막혀 오지는 않았습니다. 닫힌 문 안에서 창피하고 서운한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동안, 숨은 차츰 고르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귓불까지 붉던 그분의 얼굴빛이 천천히 가라앉았습니다. 그날 저녁 엄마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는 장면 속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에게만 털어놓은 비밀이 큰엄마와 누나에게 알려져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아내에게만 한 말이 옆집으로 새어 나갔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이 경험 하나가 망상장애를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두 장면 모두 믿고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졌다고 느낀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이 조였습니다. 상담에서는 이때의 서운함과 몸의 반응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서랍에서 나온 휴대전화
수건에 싸여 서랍 속에 있던 휴대전화는 이제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밤에는 전원을 켜 둔 채 잠들고, 새벽에 현관문 구멍을 내다보러 일어나는 일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변화는 아내가 경비실 앞에서 옆집 사람과 한참 이야기하다 들어온 저녁에도 드러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현관까지 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캐물었을 그분이, 그날은 "옆집 강아지 수술은 잘 됐대?" 하고 물었습니다.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가 들은 소식이었습니다. 처제가 전화로 형부는 좀 어떠냐고 묻던 날에는 병원 다니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고 먼저 아내에게 말했답니다. 약은 주치의와 상의하며 계속 복용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집 안에서만 목소리를 낮추고 같은 의심을 증거만 바꿔 가며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로 이어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치료 뒤에도 특정한 말소리를 들을 때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이 굳는다면, 주치의와 상의한 뒤 그 반응과 함께 떠오르는 감정과 경험을 상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최면 원인치료란 무엇일까? 무의식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원리와 과정
반복되는 감정과 몸의 반응을 최면상담에서 어떻게 살펴보고 다루는지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