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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 엄마가 교문 앞에서 웃으면서 다가오잖아요. 그럼 등줄기부터 싸늘해져요. 커피 한잔하자는 말이 우리 집 사정을 캐내려는 소리로 들리거든요. 그냥 인사라는 거, 저도 알아요.”
초등학교 1학년 딸을 키우는 서른여덟 살 여성분이 상담실 의자에 앉자마자 꺼낸 말입니다. 그날 아침에도 같은 반 엄마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자 딸의 책가방 끈을 쥔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습니다. 입안이 바짝 말라 “다음에요”라는 한마디조차 잘 나오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 식탁에 앉은 뒤에도 가슴이 한참 두근거렸다고 합니다.
의심은 교문 앞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엄마들이 모여 웃고 있으면 자기 흉을 보는 것 같아 하교 시간보다 일부러 늦게 나갔고, 그동안 딸은 텅 빈 교문 앞에서 혼자 기다렸습니다. 딸이 친구 생일잔치 초대장을 받아 왔을 때는 그 집 엄마가 무슨 속셈으로 부르는지 몰라 답을 미뤘습니다. 저녁마다 딸에게 누가 우리 집 이야기를 묻지 않았느냐고 캐물었고, 딸은 어느 날부터 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휴대전화로 편집증과 피해망상을 번갈아 검색하다 새벽을 맞았습니다. 이러다 정말 병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이미 병인데 자신만 모르는 것은 아닌지 무서웠다고 하셨습니다. 교문 앞의 몇 분으로 시작된 의심이 어느새 하루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진료실에서 받은 질문
상담실에 오기 전 그분이 먼저 찾은 곳은 정신건강의학과였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를 물었고, 그중 한 질문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고 하셨습니다. “그 엄마가 정말 인사만 하려던 거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떨 것 같으세요?”
그분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습니다. “다행이다 싶겠죠. 그런데 다음에 또 의심할 것 같아요.”
피해망상은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거나 괴롭히거나 해치려 한다는 믿음이 사실과 다른데도 강하게 굳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대되는 증거를 확인해도 믿음이 쉽게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사실을 확인하면 마음이 놓일 것 같고, 스스로도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확신으로 굳은 망상과는 양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한 가지 질문만으로 구분할 수는 없으므로 정확한 판단은 정신건강의학과 평가를 통해 받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쓰는 ‘편집증’이라는 말은 흔히 남의 친절이나 가벼운 말에도 숨은 뜻이 있다고 의심하는 경향까지 넓게 가리킵니다. 이런 불신이 오래 이어지고 여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면 성격 탓으로만 넘기지 말고 진료를 받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설명해도 확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거나, 아무도 없는데 말소리가 들리거나, 누군가에게 맞서거나 앙갚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상담보다 진료가 먼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가 중심이 되어야 하며, 최면상담으로 진료나 약물치료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진료에서 망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불안을 덜어 주는 약을 먹은 뒤 밤에 가슴이 쿵쾅대는 날은 줄었습니다. 하지만 교문 앞에서 누가 웃으며 다가오면 등줄기부터 싸늘해지는 반응은 그대로였습니다.
의심보다 먼저 굳는 몸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반응을 ‘불신·학대 도식’이라는 심리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심리도식은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되며 익숙해진 생각과 감정의 틀입니다. 불신·학대 도식이 강하면 “사람은 결국 나를 이용하거나 상처 입힐 수 있다”고 미리 짐작해, 평범한 인사나 초대도 경계해야 할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경계 수준을 가장 높여 둔 공항 보안검색대에서는 생수병 하나, 아이 장난감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못합니다. 검색 요원은 가방을 열어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면 다시 살핍니다. 그분에게는 같은 반 엄마의 인사도, 딸이 받아 온 초대장도 속뜻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는 가방과 같았습니다.
그분도 교문 앞에 서기 전 “그냥 인사야”라고 속으로 몇 번씩 되뇌었고, 육아 커뮤니티에서 본 호흡법도 따라 했습니다. 남편은 그 엄마가 원래 누구에게나 살갑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밤에는 조금 나았지만, 다음 날 그 엄마가 손을 흔드는 순간 등줄기는 다시 싸늘해졌습니다.
생각으로는 인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은 그보다 먼저 물러날 준비를 했습니다.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몸에 익은 무의식 자동반응은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 쉽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담에서는 깊이 집중한 상태에서 몸의 반응을 따라가며, 그 반응과 함께 떠오르는 오래된 장면과 감정을 살펴봤습니다.
모래밭에서 물러선 아이
깊은 최면 속에서 교문 앞에 섰을 때 느끼던 싸늘함에 집중하자, 그분에게 오래전 놀이터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손에 모래가 묻어 있어요. 학교가 아니라 놀이터예요.”
손이 작아 엄마 손가락 두 개를 겨우 감싸 쥐던 무렵의 늦은 오후였습니다. 아이는 동네 놀이터 모래밭에 쪼그려 앉아 플라스틱 삽으로 모래를 퍼 담고 있었고, 엄마는 모래밭 가장자리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공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와 허리를 굽혔습니다. “아가, 이 공 한번 굴려 볼래?”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습니다. 아이는 삽을 쥔 채 엉거주춤 일어나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벤치에서 달려온 엄마는 아이의 손목을 잡아당긴 뒤 할아버지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고는 아이 귀에 대고 낮게 말했습니다. “모르는 사람한테 가면 안 돼. 사람은 믿으면 안 돼. 웃는다고 다 좋은 사람 아니야.” 엄마는 그 무렵 외삼촌이나 옆집 아주머니 이야기를 할 때도 끝에 같은 말을 덧붙이곤 했습니다.
엄마 손에 끌려가면서도 아이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봤습니다. 등은 동그랗게 웅크려졌고 숨은 짧게 끊겼습니다. 할아버지가 머쓱하게 웃으며 다른 아이들 쪽으로 걸어간 뒤에도 아이는 엄마 무릎에 올라앉아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물러서야 하고, 친절 뒤에도 위험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경계가 몸과 함께 남은 장면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그분은 벤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엄마 품에서 등을 웅크린 어린 자신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을 굴리자고 다가온 것이며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거리를 둔 채 지켜봐도 되고, 조심하는 것과 모든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은 다르다고 전했습니다.
낯선 사람을 무조건 믿으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두고 살피면서도, 웃으며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겁먹고 물러날 필요는 없다는 이해였습니다.
이어 같은 놀이터 장면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공을 끼고 다가왔고, 아이는 똑같이 뒷걸음질 쳤습니다. 엄마도 같은 말을 하며 손목을 잡아끌었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진 일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이는 엄마 곁에서 거리를 지킨 채 할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웃으며 다가온 사람이 곧 자신을 해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할아버지 옆구리에 낀 빨간 공도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경험 하나만으로 지금의 모든 의심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분에게는 웃는 얼굴이 가까이 오면 몸부터 웅크리고 물러나는 반응과,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던 경험이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교문 앞에서도 상대의 인사를 확인하기 전에 속셈을 의심하고 몸부터 물러났다는 점에서 두 장면의 연결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운동회 날 교문 앞에서
가을 운동회 날, 교문 앞에서 같은 반 엄마가 또 손을 흔들며 다가왔습니다. 등줄기가 한 번 싸늘해졌지만 그분은 딸의 손을 잡은 채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습니다. “끝나고 커피 한잔 어때요?”라는 말에 이번에는 “좋아요. 저도 여쭤볼 게 있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운동회가 끝난 뒤 학교 앞 카페에서 두 사람은 다음 주 현장체험학습 준비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셨습니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생일잔치 초대장에도 답을 보냈습니다. 잔치가 열린 토요일에는 딸을 데려다주고 다른 엄마들과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뒤 딸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누가 우리 집 이야기를 묻지 않았느냐고 캐묻는 대신 잔치에서 무슨 놀이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딸은 케이크에 꽂힌 초가 몇 개였는지까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조심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지금도 한 걸음 떨어져 말을 건넨다고 합니다. 달라진 것은 누군가 웃으며 다가올 때마다 숨은 속셈부터 떠올리고 몸이 굳던 반응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인사를 받고 돌아와 그 말의 속뜻을 몇 번이고 곱씹고 계신가요? 반대되는 사실을 들어도 확신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먼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먼저 물러선다면, 생각보다 앞서 움직이는 경계 반응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필요한 조심성은 지키면서도 모든 친절을 위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상담에서 다룰 수 있는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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