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네, 구, 구, 구매팀… 자, 잠깐만요. 제가 다시 저, 전화드리겠습니다.”
식자재 유통 회사 구매팀에서 일하는 서른여섯 살 남성분이 거래처 전화를 받다가 서둘러 끊으며 한 말입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끝이 떨렸고, 목 안쪽은 누가 움켜쥔 듯 조여 있었습니다. 숨도 편하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통화가 몇 해째 반복됐습니다. 회사 밖에서는 편하게 말하던 사람이 왜 전화와 회의에서만 목부터 굳는 것일까요?
그날도 그분은 휴대전화만 챙겨 비상계단으로 나갔고, 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책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평소에도 사무실 전화가 울리면 첫 벨부터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모니터만 보며 누군가 대신 받아 주기를 기다렸고, 먼저 걸어야 할 때는 할 말을 메모지에 적어 몇 번씩 읽은 뒤에야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메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이메일로 돌렸습니다.
주간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차례가 다가오면 보고할 내용보다 어느 단어에서 걸릴지를 먼저 헤아렸습니다. 유독 ‘ㄱ’으로 시작하는 말에서 소리가 되풀이되어, “구매 단가”라고 해야 할 대목에서 “매입가”라고 돌려 말하곤 했습니다. 동료들은 긴장해서 그러니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천천히 하려고 애쓸수록 같은 소리를 더 여러 번 되풀이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회사 밖에서는 달랐습니다. 대학 동기들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을 때는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떠들었습니다. 잠들기 전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 줄 때도, 퇴근길 차 안에서 노래를 따라 부를 때도 말은 술술 나왔습니다. 어릴 때도 말이 급해지면 가끔 더듬었지만 오래 잊고 지냈는데, 구매팀으로 옮겨 하루 수십 통씩 전화를 맡으면서 다시 심해졌다고 합니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니라면, 왜 수화기만 들면 목부터 조여 오는 걸까요?
마주 앉으면 나오는 말, 수화기 앞에서 걸리는 말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때는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 모습이 보입니다. 말이 잠깐 걸려도 눈빛과 손짓으로 뜻이 이어집니다. 전화에는 그런 신호가 없습니다. 말이 한 번 멈추면 수화기 너머의 침묵이 길게 느껴지고,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되돌아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야 하는 회사 이름과 자기 이름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대학 동기들과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하면서도, 같은 동기에게 전화가 오면 받지 못했습니다. 벨이 끊길 때까지 화면만 보다가 ‘회의 중, 이따 연락할게’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같은 사람과 대화해도 전화기를 사이에 두면 말이 달라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분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회의에서도 비슷한 긴장이 나타났습니다.
말이 걸린 순간을 며칠 동안 적어 보면 어떤 상황에서 심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혼자 말하거나 노래할 때, 가까운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는 괜찮은데 전화와 회의에서만 부쩍 늘어나는지 눈여겨보세요. 그렇다면 말하는 능력뿐 아니라 상대가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 몸에 들어가는 긴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 막히기 직전에 숨을 참는지, 자기 말보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살피는지도 함께 적어 보세요.
손가락이 먼저 아는 현관 비밀번호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데에는 반복을 통해 몸에 익힌 과정이 관여합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신발 끈을 묶을 때 순서를 하나씩 떠올리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말할 때도 혀를 어디에 두고 숨을 언제 내쉴지 매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걸리면 어쩌지’ 하는 긴장이 커지면, 저절로 이어지던 말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조절하려 들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말의 흐름이 흔들리고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소리가 막히기도 합니다. 막힌 통화가 쌓이면서 그분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벨 소리만 듣고도 목이 조여 왔습니다. 말더듬에는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하지만, 이분처럼 상황에 따라 차이가 크다면 그때 올라오는 긴장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관 도어락을 여는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매일 누르는 번호는 손가락이 먼저 기억해, 평소에는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택배 상자를 든 이웃이 뒤에서 기다리면 괜히 ‘몇 번이었지?’ 하며 숫자를 하나씩 떠올리게 됩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멈칫하고 같은 숫자를 두 번 누르기도 합니다. 그분의 말도 누군가 답을 기다릴 때마다 이와 비슷하게 막혔습니다.
그분도 두 해 전에는 언어치료실에 다니며 숨을 내쉬면서 말을 부드럽게 시작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치료실에서 소리 내어 읽을 때는 말이 한결 매끄러웠고, 그때 배운 호흡은 지금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무실 전화 앞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벨이 울리면 배운 걸 떠올릴 틈도 없이 목부터 막혀요. 잘 말해야지 할수록 더 걸리고요.”
언어치료에서 익힌 방법은 말을 부드럽게 시작하고 이어 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목이 조이고 숨이 멈추면 배운 방법을 떠올릴 틈이 없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목이 막히는 느낌에서 출발해, 그와 비슷한 긴장이 담긴 오래된 경험과 당시의 감정을 함께 살펴봅니다.
잼 병 두 개 앞에서 멈춘 손가락
눈을 감고 깊은 최면에 든 그분에게, 벨이 울릴 때 목 안쪽이 조여 오는 느낌에 한동안 머물러 보게 했습니다. 잠자코 있던 그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식탁이에요. 엄마가 가방을 멘 채 서 있어요.” 전화기도 회사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장면도 아니었습니다.
식탁 의자에 방석을 두 장 겹쳐 깔아야 겨우 식탁 위가 보이던 무렵입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엄마가 식빵 한 쪽을 접시에 올리고 딸기잼과 초코잼 병을 아이 앞에 나란히 놓습니다. “뭐 발라 줄까? 빨리 골라, 늦었어.” 엄마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봅니다.
아이는 두 잼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얼굴을 올려다봅니다. 엄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빨리 하라니까”라고 재촉하자, 아이의 목이 굳고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엇을 고르기도 전에 엄마가 짧게 한숨을 쉬고 병 하나를 열어 빵에 잼을 바르기 시작합니다.
어른이 된 그분은 아이 곁으로 가 몸을 낮추고, 귀에 대고 작게 말해 주었습니다. “빨리 하라는 소리에 숨이 턱 막혔지. 엄마는 시간이 급해서 그래. 네가 뭘 고르는지 시험하는 게 아니야. 딸기를 골라도, 초코를 골라도 다 괜찮아.”
그 말을 전한 뒤, 그분은 같은 아침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손목시계를 보며 빨리 하라고 했고, 아이는 두 잼 사이에서 망설였습니다. 외부 상황은 그대로였지만 숨은 멈추지 않았고, 뻣뻣하던 목에서도 힘이 빠졌습니다.
그 아침 식탁이 그분의 말더듬을 만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 재촉하며 답을 기다릴 때, 자기 선택이 맞는지부터 살피며 숨을 멈추고 목을 굳히는 모습은 전화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두 장면에 함께 나타난 긴장과 몸의 반응을 다뤘습니다.
두 번째 벨에 든 수화기
상담 뒤 어느 오전, 책상 위 전화가 울리자 그분은 두 번째 벨에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회사 이름을 대고 자기 이름을 말할 때 첫 글자가 한 번 되풀이됐습니다. 그래도 전화를 끊지 않고 숨을 한 번 내쉰 뒤 말을 이었고, 거래처 담당자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주 납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통화를 마친 뒤에는 비상계단 대신 발주서로 손이 갔다고 합니다.
주간 회의에서는 단가 비교표를 직접 설명했습니다. “매입가”로 돌려 말하던 대목에서 “구매 단가”라고 그대로 말했고, 동료들의 얼굴을 살피는 대신 화면 속 표를 짚어 가며 끝까지 보고했습니다.
그 주 금요일 저녁에는 몇 해 동안 문자로만 답하던 대학 동기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둘은 이십 분 넘게 통화하며 다음 달 모임 날짜를 잡았다고 합니다.
오늘도 전화벨이 울리자 모니터만 바라보며 누군가 대신 받아 주기를 기다리셨나요? 말하기 방법을 익혀도 수화기를 드는 순간 목부터 굳는다면, 말보다 먼저 시작되는 긴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누군가 답을 기다릴 때 숨과 목을 조이던 반응과 그에 얽힌 경험을 다룬 일이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최면 원인치료란 무엇일까? 무의식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원리와 과정
반복되는 감정과 몸의 반응을 최면상담에서 어떻게 살펴보고 다루는지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