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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려고 키보드를 덮는데 자판 사이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었어요. 저는 도면만 보고 있었거든요. 언제 이만큼 뽑았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그리는 서른한 살 여성분입니다. 그날도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수정 도면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자판을 보고 놀라 왼쪽 정수리를 더듬어 보니 손끝에 까슬까슬한 빈 곳이 걸렸습니다. 봄까지만 해도 동전만 하던 곳이 엄지손톱 두 개를 붙여 놓은 만큼 넓어져 있었고, 두피는 화끈거리며 따끔했습니다.
그분은 휴지로 자판 위 머리카락을 쓸어 모아 쓰레기통 맨 밑에 밀어 넣고서야 사무실 불을 껐습니다. 아침마다 가르마를 반대쪽으로 넘겨 빈 곳을 덮었고, 바람 부는 날에는 건물 사이를 지날 때마다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눌렀습니다. 대학 동기들이 해마다 가는 여행도 삼 년째 일을 핑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친구들 옆에서 머리를 묶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검색창에 ‘머리카락 뽑는 습관’을 쳐 보고서야 발모벽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이름을 알게 됐다고 손이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자 “그냥 안 뽑으면 되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카락을 뽑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짧게 자른 머리, 손끝에 감은 반창고
그분도 여러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먼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귀밑까지 짧게 잘랐습니다. 손끝에 잡히는 머리카락이 짧아지자 한동안 뽑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다시 자라면서 손도 정수리로 돌아왔습니다.
다음에는 왼손 엄지와 검지 끝에 반창고를 감고, 책상에는 손에 쥘 말랑한 공을 올려 두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잘 잡히지 않고 손이 바쁘니 뽑는 날이 줄었습니다. 문제는 도면에 푹 빠져든 밤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반창고는 떼어진 채 마우스 옆에 붙어 있었고, 공은 모니터 뒤로 굴러가 있었습니다.
손이 머리카락에 닿기 어렵게 하자 뽑는 횟수는 줄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반창고를 언제 떼고 공을 언제 내려놓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마음먹은 적도 없는 일을 손은 어떻게 이토록 익숙하게 이어 갔을까요?
번호는 가물가물해도 손가락은 아는 도어록
몸이 동작을 익혀 두었다가 생각하지 않고도 꺼내 쓰는 기억을 ‘절차기억’이라고 합니다. 신발 끈을 묶거나 자판을 칠 때 순서를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아도 손이 알아서 해내는 것이 한 예입니다. 현관 도어록도 비슷합니다. 누가 번호를 물으면 잠깐 머뭇거리지만, 문 앞에 서면 손가락이 먼저 번호를 누릅니다. 번호를 의식적으로 떠올리기도 전에 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뽑는 행동도 반복되면 이처럼 거의 자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긴장하거나 허전하거나 지루할 때 한 올을 뽑고 잠깐 마음이 가라앉는 일이 거듭되면, 비슷한 순간에 손이 먼저 움직이기 쉽습니다. 그러면 생각은 도면에 가 있어도 손은 익숙한 동작을 이어 가고, 알아차렸을 때는 손가락 사이에 이미 머리카락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뽑자”는 다짐은 손이 움직인 뒤에야 떠오르기도 합니다.
혹시 나도 그런지 가늠해 보고 싶다면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보다 그 직전을 떠올려 보세요.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지, 손이 먼저 머리로 가 있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손이 먼저였다면 의지의 문제로만 여기기보다 자동으로 이어지는 습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곁에 누가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떠올려 보면 손이 움직이는 때가 보입니다. 그분이 머리카락을 많이 뽑는 때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모두 떠난 사무실에서 혼자 도면을 고치는 밤, 그리고 약속 없이 집에 혼자 있는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팀원들과 회의실에 도면을 펼쳐 놓고 이야기하는 날에는 자판 위가 깨끗했다고 합니다.
반창고와 공은 손이 머리카락에 닿는 것을 막아 주었지만, 혼자 남아 막막하거나 허전해지면 손부터 움직이는 반응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시작되기도 합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손이 머리로 향하기 직전 몸에 올라오는 감각에서 출발해, 그 감각과 함께 떠오르는 경험과 감정을 살펴봅니다. 그분에게는 정수리의 근질거림과 가슴 한가운데가 휑하게 비는 느낌이었습니다.
선풍기가 고개를 돌리던 작은방
그분이 깊은 최면 상태에서 가슴의 휑한 느낌에 머물러 있을 때였습니다. 잠시 뒤 작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소매예요. 내복 소매 끝에 실이 삐져나와 있어요.”
내복 단추를 아직 혼자 채우지 못하던 무렵입니다. 그날도 낮잠 시간이 되자 아이는 작은방의 얇은 요 위에 혼자 눕혀집니다. 어머니는 “한숨 자고 나면 부를게” 하고 방문을 닫습니다. 선풍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문 너머 부엌에서는 그릇 부딪는 소리와 놀러 온 옆집 아주머니와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천장과 닫힌 문을 번갈아 보다가 내복 소매 끝에 삐져나온 실을 만지작거리며 살살 당깁니다. 그러고 있으면 가슴 한가운데의 휑한 느낌이 조금 덜해집니다. 부엌에서 웃음소리가 크게 터지면 손은 다시 실로 향합니다.
한참 뒤 방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다 잤어?” 하며 들여다봅니다. 아이는 소매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 어머니를 따라 나갑니다.
그분은 최면 속에서 요 위의 아이 곁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하나씩 알려 주었습니다.
“저건 엄마가 그릇을 헹구는 소리야. 저 웃음소리는 옆집 아주머니 목소리고. 엄마는 문 바로 너머에 있어. 잠이 안 와도 괜찮아. 조금 있으면 엄마가 문을 열고 너를 불러.”
소리가 무엇인지,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아이와 함께 그 낮잠 시간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선풍기는 똑같이 고개를 돌렸고 부엌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터졌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소매 끝의 실을 만졌지만, 가슴 한가운데의 휑한 느낌은 전보다 덜했고 실을 세게 당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혼자 남아 가슴이 휑해지면 소매 끝의 실을 만지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성인이 된 뒤에는 같은 허전함이 올라오는 밤이면 머리카락을 뽑았습니다. 상담에서는 두 장면에 함께 나타난 감정과 반복적인 손의 반응을 살펴봤습니다.
마우스 옆에 내려놓은 왼손
상담을 마친 뒤에도 마감을 앞두고 혼자 사무실에 남는 밤은 있었습니다. 도면 선을 고치던 중 왼손이 정수리로 올라갔고, 손끝에 머리카락 몇 올이 감겼습니다. 그분은 그 감촉을 느끼고 손을 멈췄다고 합니다.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고 숨을 한 번 내쉰 뒤, 손을 내려 마우스 옆에 두었습니다. 퇴근하며 키보드를 덮을 때 자판 사이에는 머리카락이 없었습니다.
주말에는 삼 년 동안 가지 않던 대학 동기들의 여행에 따라나섰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세면대 앞에서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고 합니다. 가르마 옆 빈 곳에는 짧은 머리카락이 까슬하게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분은 손끝으로 한 번 쓸어 보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오늘도 책상이나 베개 위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셨나요? 뽑을 생각이 없었는데 손이 먼저 가 있었다면,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반복되며 자동화된 반응이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머리를 자르거나 반창고를 감는 방법은 손이 머리카락에 닿는 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손이 먼저 움직이는 일이 반복된다면, 어느 때 그런 반응이 시작되는지와 그 순간의 감정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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