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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그건 제가 아직 못 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시는 게 나을 겁니다.”
자동차 부품 공장 품질관리팀에서 열두 해째 일하는 마흔한 살 남성분이 팀장에게 한 말입니다. 팀장은 곧 가동할 새 생산 라인의 품질 담당을 맡아 보라며 설명 자료를 책상 위로 밀어 주던 참이었습니다. 그분은 자료의 첫 장도 넘겨 보지 않았습니다. 종이가 손끝에 닿기도 전에 두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리고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습니다.
배 속은 찬물을 들이켠 듯 서늘하게 가라앉았고 입안은 금세 말랐습니다. 팀장실을 나온 그분은 곧장 주차장으로 가 차 안에 한참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가슴은 쿵쿵 뛰는데 다리에는 힘이 빠졌습니다. 그날 밤에는 식탁에 다섯 번째 자격증 문제집을 펴 놓고 새벽 두 시까지 밑줄을 그었습니다.
상담실에서 그분이 가장 먼저 꺼낸 것도 자격증 이야기였습니다. “회사 책상 서랍에 자격증이 네 장 있어요. 팀장님은 현장에서 저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땐 좋은데, 새 일 얘기만 나오면 그게 다 없던 일이 돼요. 하나만 더 따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네 번째를 땄을 때도 똑같았어요.”
해낸 일이 이렇게 많은데도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 때는 무엇을 살펴봐야 할까요? 상담에서 그분의 반응을 따라가자, 어린 시절 안방 장판 위에서 돌던 나무 팽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자격증 네 장으로도 달라지지 않던 반응이 팽이 앞의 아이와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서랍 속 자격증 네 장
그분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삼 년 전 조장을 맡아 달라는 말을 사양했을 때는 아직 경험이 모자라서라고 여겼습니다. 그 뒤로 퇴근 후에 공부해 자격증을 두 장 더 땄고, 공정 개선 제안으로 사내 상도 두 번 받았습니다. 측정값이 이상하게 나오면 후배들은 제일 먼저 그분 책상으로 찾아왔습니다.
작은 성공을 하나씩 쌓아 가는 것은 자신감 회복에 흔히 권하는 방법이고, 실제로 여기서 힘을 얻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근거가 늘어도 그대로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늘 하던 검사에서는 누구보다 차분했지만, 해 본 적 없는 일이 앞에 놓이면 ‘아직 못 한다’는 말부터 나왔습니다. 작년에 거래처 공장 감사에 함께 가자는 제안도 그렇게 사양했습니다.
칭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팀장이 “이 라인은 너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때면 가슴이 잠깐 따뜻해졌습니다. 하지만 새 일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그 따뜻함은 사라지고, ‘그건 지금 하는 일 얘기고’라는 생각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미 해낸 일에 대한 칭찬은 몇 번을 들어도, 해 보지 않은 일 앞에서는 힘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판결문이 먼저 나와 있는 재판
이런 반응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실패 도식’으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거치며 ‘나는 끝내 해낼 수 없다’는 믿음이 굳어지면, 새로운 일을 만날 때마다 그 생각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미 해낸 일은 ‘그때만 가능했던 일’로 밀어 두고, 해 보지 않은 일에는 결과를 확인하기도 전에 ‘못 한다’는 답을 붙입니다. 성공이 여러 번 쌓여도 다음 일을 시작할 자신감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판결문을 미리 써 둔 재판에 빗대어 볼 수 있습니다. 변호인이 증거 서류를 한 상자 가득 내도 판사가 이미 써 둔 판결문만 읽는다면 결론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분이 모은 자격증과 칭찬도 모두 진짜 증거였습니다. 다만 ‘새 일은 못 한다’는 결론이 그 증거를 살펴보기도 전에 먼저 나왔습니다.
그분도 팀장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번만큼은 해 보겠다고 말하자며 몇 번이나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자료가 앞으로 밀려오자 배가 먼저 서늘해졌고 손은 무릎으로 내려갔습니다. 입에서는 사양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때 했던 다짐은 모든 일이 지나간 뒤에야 다시 떠올랐다고 합니다.
마음을 먹기도 전에 몸과 말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무의식 자동반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격증을 한 장 더 보태고 여러 번 다짐해도 팀장실 책상 앞의 몇 초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새 일 앞에서 배 속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주의를 모읍니다. 그 감각과 함께 떠오르는 경험을 살피고, 그 경험 속 아이가 당시 알지 못했던 점을 이해하도록 도우며 지금의 반응이 달라질 가능성을 찾아갑니다.
방석 위에서 바라보던 팽이
최면이 깊어진 뒤, 그분에게 팀장실 책상 앞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게 했습니다. 설명 자료가 밀려오는 순간 배 속이 다시 서늘해졌고, 무릎 위의 두 손이 저절로 오므라들었습니다. 그 느낌에 집중하던 그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바닥에서 뭐가 웅웅거리며 돌아요. 아버지 손에 줄이 감겨 있어요.”
저녁을 먹고 난 안방입니다. 숟가락을 아직 서툴게 쥐던 무렵의 남자아이가 장판 위 방석에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온 나무 팽이에는 빨강과 초록 줄무늬가 둘려 있습니다. 아버지가 팽이 몸통에 줄을 칭칭 감더니 손목을 휙 젖혀 바닥에 던집니다. 팽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하자 아이는 손뼉을 치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갑니다.
팽이가 비틀거리다 옆으로 쓰러집니다. 아이가 바닥에 늘어진 줄 끝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아버지가 웃으며 줄을 먼저 거둬 갑니다. “이건 아직 네 손으로는 못 돌려. 좀 더 크면 아빠가 가르쳐 줄게.” 줄에 닿지 못한 아이의 손은 잠시 허공에 머물다가 무릎 위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팽이를 몇 번이고 다시 돌립니다. 아이는 방석으로 돌아가 앉아 팽이만 바라봅니다. 팽이가 쓰러질 때마다 손가락이 움찔하지만 다시 손을 뻗지는 않습니다. 배 속이 서늘해지고 무릎 위의 두 손은 작은 주먹이 됩니다.
그분은 최면 속에서 방석 위의 아이 곁으로 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팽이보다 줄을 감는 아버지의 손을 아이와 함께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줄을 잡아 보고 싶었지. 손이 거의 닿았는데 아빠가 먼저 가져갔구나. 아빠 손을 봐. 줄을 아래부터 한 바퀴씩 감고 손목을 젖히잖아. 아빠도 해 보면서 익힌 거야. 너는 아직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으니, 못 한다고 정해진 게 아니야.”
그런 다음 장면은 아버지가 팽이에 처음 줄을 감던 순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분은 방석에 앉은 아이의 눈으로 그 저녁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직 못 돌려” 하고 웃으며 줄을 먼저 거둬 갔고, 아이도 전처럼 손을 무릎으로 거두고 팽이를 바라봤습니다. 다만 배 속이 차갑게 가라앉지 않았고, 무릎 위의 손도 주먹을 쥐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눈은 쓰러지는 팽이보다 아버지 손에서 줄이 감기는 모양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 저녁 이후 팽이 줄을 제 손으로 잡아 본 적이 있는지는 그분도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아직 못 돌려’는 아이가 줄을 한 번 잡아 보기도 전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아이는 새 놀이 앞에서 손부터 거두었고, 지금도 설명 자료가 밀려오자 내용을 살피기 전에 두 손을 무릎으로 내렸습니다. 과거와 현재에는 ‘해 보기 전에 손을 거두는’ 반응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자격증과 칭찬은 이미 해낸 일의 증거였지만, 이 반응까지 바꾸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 장부터 끝까지 넘긴 설명 자료
상담 뒤 그분은 먼저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새 라인 담당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면 설명 자료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료를 받아 든 뒤에는 의자에 앉아 첫 장부터 끝까지 넘겼습니다. 배 속이 조금 서늘했지만, 두 손은 책상 위에서 볼펜을 쥐고 있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처음 보는 설비 두 가지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이 두 가지는 배워 가면서 하겠습니다. 맡겨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전에는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못 한다’고 말했다면, 이번에는 일을 끝까지 살펴본 뒤 무엇을 배워야 할지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새 라인이 가동된 첫 주에는 새로 들어온 측정 장비 앞에 가장 먼저 섰다고 합니다. 설명서를 옆에 펴 두고 설정값을 넣다가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해 엉뚱한 측정값이 나온 날도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역시 난 안 돼’ 하며 장비에서 물러났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장비 업체 기술자에게 전화를 걸어 설정 순서를 다시 묻고 값을 고쳐 넣었습니다.
식탁 위에 펼쳐 두었던 다섯 번째 자격증 문제집은 책꽂이로 옮겼다고 합니다. 공부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 라인 일이 손에 익으면 다시 펴 볼 생각이지만, 이제 그 책은 새 일을 맡기 전에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새 일을 제안받았을 때 ‘못 하겠다’는 말이 언제 나오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일의 내용을 다 들은 뒤 ‘이 부분은 아직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아낸 것입니다. 반대로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나는 안 돼’가 먼저 나온다면, 일을 살펴보고 내린 판단보다 해 보기 전에 저절로 나오는 반응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자격증을 한 장 더 따고 칭찬을 한 번 더 들으면 그때는 달라질 거라며 기다려 오셨나요? 그렇다면 근거를 더 보태기 전에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해 보기도 전에 ‘못 한다’고 답하게 만드는 반응이 누그러져야, 그동안 모아 온 경험도 다음 일 앞에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