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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이 부분은 제가 다시 정리해서 오후에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식품회사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서른세 살 남성분이 주간 회의에서 한 말입니다. 팀장은 화면에 띄운 보고서를 넘기다 세 번째 장에서 말없이 손을 멈췄을 뿐이었습니다.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입을 다문 팀장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그분은 명치 아래가 싸해지고 목 뒤가 뜨거워졌습니다. 책상 밑에서 쥔 손바닥도 금세 축축해졌다고 합니다.
회의가 끝나자 점심도 거른 채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고쳤습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씻으려고 틀어 둔 샤워기 앞에서도 팀장의 굳은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에는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새로 올린 보고서를 본 팀장이 물었습니다. "어제 거 괜찮던데 왜 또 고쳤어? 난 숫자 하나 맞는지 보느라 그런 건데." 안도한 것도 잠깐이었습니다. 아무 뜻 없던 표정 하나에 밤을 새운 자신이 한심해 귀까지 달아올랐다고 합니다.
비슷한 일은 회사 밖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여자친구가 "응" 한 글자로 답장하면 앞서 보낸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편의점 직원이 무표정하게 계산만 해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되짚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눈치가 빠르고 센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에요. 하루 종일 눈치를 보는 거예요." 상담실에서 이 말을 할 때도 그분은 웃고 있었습니다. 눈치 보는 성격은 흔히 마음이 여린 탓으로 여겨집니다. 이 글에서는 그분의 이야기를 따라 남의 표정에 흔들리는 이유와, 그런 반응을 최면상담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괜찮다는 말보다 얼굴을 먼저 믿는다면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배려심이 깊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는 것은 분명 좋은 능력입니다. 차이는 상대의 표정을 본 다음에 드러납니다. 무엇을 할지 스스로 고를 수 있다면 배려에 가깝습니다. 고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츠러들고 사과할 말부터 떠오른다면, 표정에 자동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가 괜찮다고 말한 뒤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한 가지 단서가 됩니다. 그분은 팀장이 "괜찮아"라고 말해도 명치의 싸한 느낌이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팀장이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왜 팀장의 말보다 얼굴을 먼저 믿었을까요? 상담에서는 회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오래전 오후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웃지 않는 얼굴이 모두 화난 얼굴로 보일 때
도식치료에서는 오랜 경험을 통해 굳어진 마음의 틀을 도식이라고 합니다. 그중 다른 사람의 인정과 반응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을 승인추구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런 틀이 강하면 아무 뜻 없는 무표정도 불만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내 말과 행동을 먼저 점검하며 상대에게 맞추려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얼굴을 비추면 기분을 글자로 알려 주는 카메라가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카메라는 웃는 얼굴이 아니면 모두 '화남'이라고 표시합니다. 생각에 잠긴 얼굴도, 피곤한 얼굴도, 숫자를 확인하는 얼굴도 똑같이 읽습니다. 그 화면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과할 말부터 찾게 됩니다. 그분에게도 팀장의 다문 입과 편의점 직원의 무표정이 곧바로 '화남'으로 읽혔고, 뒤이어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분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휴대전화 잠금 화면에 '신경 쓰지 말자'라고 적어 두었고, 퇴근길마다 마음에 걸린 표정을 다른 쪽으로 풀이해 보았습니다. 팀장은 숫자를 확인하느라, 여자친구는 운전 중이라 그랬을 수 있다고 적는 식이었습니다. 이 연습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자주 표정을 나쁜 쪽으로 읽는지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치면 다른 풀이를 떠올리기도 전에 명치가 먼저 서늘해졌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요, 얼굴을 보는 순간 몸이 벌써 사과하고 있어요." 표정을 읽고 맞추는 반응은 생각할 틈도 없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렇게 몸에서 먼저 시작되는 감각에 집중해, 그 감각과 함께 떠오르는 오래된 감정과 경험을 살펴봅니다.
싫다고 말한 뒤 사라진 웃음
최면이 깊어지자 그분은 팀장이 말없이 손을 멈추던 회의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명치 아래가 싸늘해지는 느낌에 집중하던 중 오른쪽 뺨을 살짝 찡그렸습니다. 뺨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고 했습니다. 바깥에서 막 들어온 엄마의 뺨이었습니다.
'싫어'라는 말이 막 입에 붙기 시작하던 무렵, 한 남자아이가 거실 바닥에 엎드려 텔레비전 만화를 보고 있습니다.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엄마가 웃으며 뒤에서 아이를 끌어안습니다. 바깥의 찬 기운이 남은 뺨을 아이 볼에 비비며 '우리 아들, 엄마 한 번 꼭 안아 줘'라고 합니다. 만화에 빠져 있던 아이는 몸을 비틀며 엄마 팔을 밀어냅니다. '싫어, 차가워.'
엄마 얼굴에서 웃음이 금세 사라집니다. 입을 꾹 다문 엄마는 '그래, 너 혼자 봐' 하고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는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만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쯤 열린 안방 문 사이로 화장대 거울에 비친 엄마 얼굴이 보입니다. 엄마는 로션을 바르면서도 아이 쪽을 보지 않습니다.
아이가 문간에서 '엄마' 하고 부르자 짧은 대답만 돌아옵니다. '왜.' 아이는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안방으로 걸어가 엄마 등에 볼을 대고 섭니다. '엄마, 안아 줘.'
거울 속 엄마의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엄마가 돌아서서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 아이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쉽니다.
그분은 최면 속에서 안방 문간에 서서 거울 속 엄마 얼굴만 올려다보던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만화를 보는데 차가운 뺨이 닿아 싫었던 마음을 먼저 알아주었습니다. 싫다고 말한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엄마가 잠깐 서운해 표정이 굳었다고 해서 아이를 미워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의 눈으로 엄마가 장바구니를 내려놓던 순간부터 그 오후를 다시 경험했습니다. '싫어, 차가워' 하며 엄마 팔을 밀어낸 일도, 굳은 얼굴로 안방에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도 그대로였습니다. 아이는 또 안방으로 가서 엄마 등에 볼을 댔습니다. 다만 거울 속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는 동안 숨을 참지 않았고, 배에 잔뜩 들어가던 힘도 훨씬 덜했습니다. 엄마가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전처럼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다시 경험하는 동안 상담 의자에 앉은 그분의 얼굴에서도 변화가 보였습니다. 상담 내내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사라졌고, 힘이 들어가 있던 볼과 눈가가 풀렸습니다.
상담에서는 가까운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면 내 뜻을 접고 먼저 맞춰야 관계가 다시 편해진다고 느꼈던 반응을 살펴봤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에게 먼저 다가가 안긴 뒤에야 숨을 내쉬었고, 지금은 팀장의 무표정 앞에서 사과부터 한 뒤 웃는 얼굴을 확인해야 마음을 놓았습니다.
사과 대신 꺼낸 질문
상담 뒤 주간 회의에서 팀장은 그분의 보고서를 넘기다 또 한참 말없이 손을 멈췄습니다. 명치가 살짝 싸해졌지만 "다시 올리겠습니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팀장님,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팀장은 "아니, 여기 단가 하나만 확인하고" 하더니 다음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책상으로 돌아온 그분은 보고서를 다시 열지 않고 오후에 잡힌 거래처 통화를 준비했습니다. 그날 밤에도 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뒤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주 토요일에는 여자친구에게 이번 주말은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잠깐 말없이 바라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곧바로 "아냐, 나가자" 하고 말을 바꿨겠지만, 그분은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오래 미뤄 둔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굳은 얼굴이 마음에 걸려 이미 보낸 메시지를 다시 열어 보셨나요? 그 얼굴이 정말 화가 난 것인지 알기도 전에 사과할 말부터 골랐다면, 그 반응을 예의나 배려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웃지 않는 얼굴을 불만의 신호로 받아들이도록 몸에 익은 반응일 수 있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예민한 마음은 잠금 화면에 적어 둔 다짐만으로 잘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의 얼굴이 굳는 순간 자신부터 고치려는 반응을 살펴보고 다룰 때,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도 곧바로 사과하기보다 필요한 질문과 자신의 생각을 꺼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