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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이 영상 정말 좋다고, 회원분들 반응이 최고라고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기뻤던 건 딱 삼 초였어요.
두 번째 장면에서 자막이 반 박자 늦게 뜬 게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그날 밤 편집 프로그램을 다시 켰어요. 벌써 올라간 영상인데요.”
가게와 학원의 홍보 영상을 만드는 서른한 살 프리랜서 영상 편집자가 상담실에서 처음 꺼낸 이야기입니다. 동네 필라테스 스튜디오 원장에게 그 메시지를 받은 날 밤, 그분은 새벽 네 시가 다 되도록 십이 초짜리 장면 하나를 수십 번 돌려 봤습니다. 눈은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했고 관자놀이가 조여 왔습니다.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혀, 숨을 내쉬어도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자막을 고친 파일을 원장에게 보내며, 이걸로 바꿔 올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답장은 짧았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요?” 그 답장을 읽고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작업 폴더에는 ‘최종’, ‘최종2’, ‘진짜최종’, ‘진짜최종_수정’ 파일이 나란히 쌓여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분을 완벽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본인도 기준이 높은 성격이라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의뢰인이 만족하고 조회수가 올라가도 끝냈다는 느낌은 오지 않았습니다.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기보다 숙제를 하나 더 받은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은 두 달째 미뤄 둔 채였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이렇게 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기준을 넘기고 칭찬까지 들었는데, 왜 이분에게는 ‘다 됐다’는 느낌이 끝내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노트북을 덮어도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영상
기준이 높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높은 기준 덕분에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살펴볼 것은 일을 마친 뒤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 하고 손을 놓을 수 있는지, 누가 괜찮다고 해 줘도 고칠 곳부터 다시 찾는지 떠올려 보세요. 후자에 가깝다면, 어려움은 기준의 높이보다 ‘다 됐다’는 느낌이 잘 찾아오지 않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도 끝없이 고치는 습관을 줄여 보려고 애썼습니다. 완벽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납품 전 확인은 세 번까지’라는 규칙을 세웠습니다. 마감 전날 밤 열 시에 알람을 맞춰 두고, 알람이 울리면 노트북을 덮었습니다. 규칙을 지킨 날은 잠드는 시간이 실제로 조금 앞당겨졌습니다.
하지만 노트북을 덮어도 머릿속에서는 영상이 계속 돌아갔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첫 장면부터 흘러가다가 마음에 걸리는 곳에서 멈추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머리로는 이만하면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가슴은 계속 ‘아직’이라고 해요.”
완벽주의를 다루는 상담에서는 기준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생각을 살피는 연습을 합니다. 이런 연습은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습관을 알아차리고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도 규칙 덕분에 손을 멈추는 법은 익혔습니다.
하지만 규칙은 생각으로 세우는 반면, ‘아직’이라는 느낌은 판단보다 먼저 몸에서 올라옵니다. 그래서 정한 횟수만큼 확인하고 노트북을 덮어도 답답함이 남을 수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렇게 저절로 일어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살펴봅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지금 느끼는 답답함에 집중하며, 같은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오래된 경험과 당시의 감정을 다룹니다.
두 번 풀고 세 번 묶은 빨간 리본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요?”라는 답장을 읽던 아침, 가슴이 꽉 막히던 그 느낌에 그분이 집중하는 사이 최면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그분의 오른손 손가락이 무언가를 쥔 듯 오므라들었습니다. “끈이 손에서 자꾸 미끄러져요. 반들반들한 빨간 끈이요.”
아빠 생일을 하루 앞둔 저녁, 안방 바닥에 줄무늬 포장지로 싼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아빠가 퇴근하기 전에 포장을 끝내려고 엄마와 어린 딸이 방문을 닫고 앉아 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펼쳐 놓은 리본 세 가지 가운데 빨간 것을 고릅니다. 가위는 아직 만지지 못하게 하던 때라, 엄마가 그 끈을 알맞게 잘라 아이 손에 쥐여 줍니다.
아이는 상자를 한 바퀴 두른 끈을 두 번 엇걸어 꼭 당깁니다. 매듭은 한쪽으로 조금 치우쳤고 양쪽 끈 끝의 길이도 다릅니다. 그래도 아이는 상자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엄마 앞에 내밉니다. “다 됐다!”
엄마가 상자를 받아 이리저리 돌려 봅니다. “어디 보자. 매듭이 옆으로 갔네. 조금만 더 반듯하게 하자.” 엄마가 끈 한쪽을 당기자 매듭이 스르르 풀립니다.
아이는 다시 묶고, 이번에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다 됐어” 합니다. 엄마는 양쪽 끈 끝을 나란히 들어 보이며 이쪽이 길다고 한 번 더 풀게 합니다.
세 번째로 묶었을 때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상자를 엄마 쪽으로 밀어 놓습니다. 입술을 꼭 다문 채 짧은 숨을 쉬며 엄마 얼굴을 올려다봅니다. 엄마가 “이제 됐다” 하며 상자를 장롱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이는 그 뒤로도 개어 둔 이불에 기대앉아 장롱 위를 올려다봅니다. 매듭이 가운데 있는지, 끈 끝이 똑같은지 자꾸 눈으로 재 봅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아빠가 그 리본을 보고 뭐라고 했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또렷하게 남아 있던 것은 손끝에서 미끄러지던 끈과 장롱 위의 빨간 매듭이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아이가 처음 “다 됐다!” 하며 상자를 들어 올린 순간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마가 상자를 받아 들기 직전이었습니다. 아이 맞은편에 앉아 상자의 매듭을 함께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네 손으로 끝까지 묶었구나. 다 됐다고 한 거, 맞는 말이야. 엄마가 한 번 더 묶자고 하는 건 엄마 눈에 더 반듯해 보이게 하고 싶어서야. 네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 이해를 전한 뒤, 그분은 다시 리본을 고르는 아이가 되어 같은 저녁을 처음부터 경험했습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매듭이 옆으로 갔다며 끈을 풀었고, 아이는 두 번 더 묶었습니다. 세 번째에도 말없이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다만 매듭이 풀리는 순간 가슴이 조였어도 곧 느슨해졌고, 숨도 짧게 끊기지 않았습니다. 장롱 위를 올려다볼 때는 매듭을 재는 대신 자신이 고른 빨간색이 예쁘다고 느꼈습니다.
간을 볼수록 싱거워지는 찌개
그 저녁, 아이가 세 번 말한 ‘다 됐다’는 모두 끝이 되지 못했습니다. 끝났다는 말은 결국 엄마가 했고,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아이는 매듭을 눈으로 쟀습니다. 원장이 충분히 좋다고 한 영상을 새벽에 다시 연 지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스로 느낀 ‘다 됐다’를 믿기보다 어긋난 곳부터 찾았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응을 ‘엄격한 기준’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도식은 자라면서 쌓인 경험과 함께 형성될 수 있는 마음의 틀입니다. 이 틀이 작동하면 무엇을 먼저 보고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달라집니다. 해낸 일은 금세 당연해지고, 모자란 부분만 크게 보여 일을 마친 안도감보다 다음에 고칠 곳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찌개를 끓이며 간을 여러 번 보다 보면, 혀가 짠맛에 익어 자꾸 싱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한 숟갈 떠먹을 때마다 소금을 조금씩 더 넣지만, 다시 떠먹으면 또 뭔가 모자랍니다. 찌개는 이미 알맞게 끓었는데 ‘이제 됐다’ 하고 불을 끌 때가 오지 않습니다. 잘 만든 영상이 그분 눈에 늘 반 박자 모자라 보인 것도 이와 닮았습니다.
‘최종’에서 멈춘 파일 이름
상담 뒤 그분은 같은 필라테스 스튜디오의 두 번째 홍보 영상을 맡았습니다. 납품 전날 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본 뒤 파일 이름을 ‘최종’으로 저장해 보냈습니다. 그 뒤에 숫자나 ‘진짜’가 붙는 일은 없었습니다. 노트북을 덮으며 길게 내쉰 숨이 이번에는 중간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원장에게서 이번 영상도 정말 좋다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분은 휴대전화를 든 채, 가슴이 또 막히는지 잠시 기다려 봤습니다.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 영상 마음에 들어요”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두 달 넘게 미뤄 온 대학 친구들과의 약속에 나갔습니다. 밥을 먹다가 한 친구가 휴대전화로 그 영상을 찾아 틀었습니다. 화면이 넘어가는 대목에서 고치고 싶은 곳이 하나 눈에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친구들과 끝까지 영상을 보며 웃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칠 곳을 알아보는 눈은 그대로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노트북을 덮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도 오늘 밤 또 고칠 곳을 찾고 있다면, 기준의 높이만 탓할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목표를 넘길 때마다 기준이 한 단계씩 높아지고, 끝낸 일을 한 번도 제대로 누려 본 적이 없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끝났다는 느낌은 규칙을 하나 더 세우는 것만으로는 돌아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해낸 일 앞에서도 ‘아직’이라고 반응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함께 다룰 때, 끝낸 일을 끝났다고 받아들이고 해낸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