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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같은 시간에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힌 듯, 묵직한 돌을 얹어 놓은 것 같은 압박감이 시작됩니다. 숨이 안 쉬어지는 것은 아닌데 들이쉰 숨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고, 목에는 무언가 걸린 듯 갑갑합니다. 심근경색이 아닐까 싶어, 한밤중에 응급실 가는 길을 검색하다 날이 밝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40대 회사원으로,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아 보셨다고 했습니다. “심전도도, 가슴 사진도, 피검사도 전부 깨끗하대요. 병원에서는 신경성 같다고만 하고요. 그런데 왜 매일 밤 가슴이 이렇게 답답한 걸까요. 어디 가서 말해도 꾀병 취급이라, 그게 더 답답해요.”
이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계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데 몸은 매일 분명하게 느끼니, 예민한 사람 취급까지 받으면 서럽고 억울해집니다.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어지럽기까지 해서, 공황장애가 아닌가 걱정하며 한참을 검색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답답함은 기분 탓이 아니라, 몸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병이 아니라 긴장이 만드는 압박감
우리 뇌에서 위험을 판가름하는 ‘편도체’라는 부위는, 위험하다고 느끼면 교감신경을 통해 온몸에 비상을 겁니다. 이때 몸은, 부딪히기 직전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 때처럼 가슴과 어깨 둘레의 근육부터 단단히 조입니다. 가슴이 짓눌리고 조이는 그 감각은 바로 이 근육의 긴장이 만드는 실제 신체 반응입니다. 심전도나 가슴 사진에 잡히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병이 아니라 긴장이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삼킨 감정이 압력이 될 때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의 가슴은 위험하지도 않은 한밤중에, 책상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조여드는 걸까요. 상담에서 만나는 이런 분들에게는 닮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화가 나도, 서운해도, 울고 싶어도 밖으로 내보내는 대신 안으로 삼키는 버릇입니다. 감정은 김과 같아서, 내보내지 못하면 안에서 압력이 됩니다. 삼킨 감정이 쌓인 가슴은 김을 빼지 않은 채 뚜껑을 꾹 눌러 둔 압력솥과 비슷합니다.
그분 역시 그랬습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싫은 소리 한 번 못 하고, ‘괜찮아요’가 입버릇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감정을 누르는 손이 의식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래된 버릇은 의식 아래 무의식에서 저절로 움직여서, 오늘은 참지 말자고 다짐해도 입은 어느새 괜찮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불안을 가라앉히는 약을 처방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약은 날카로워진 신경을 누그러뜨려, 가슴이 조여드는 횟수를 줄이는 분명한 역할을 합니다. 다만 솥 안에 이미 차 있는 김, 그러니까 오랫동안 삼켜 온 감정까지 빼 주지는 못합니다.
울음마저 삼켜야 했던 어린 날
최면상담은 바로 그 무의식을 다루는 작업입니다. 의식의 다짐 너머로 들어가, 감정을 삼키는 버릇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첫 자리를 찾아갑니다. 그분도 깊은 최면 속에서 가슴 한가운데의 그 묵직함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닿은 곳은 회사도 침실도 아닌, 말도 서툴던 서너 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른들로 북적이던 친척 집, 아이는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무서운 얼굴로 ‘뚝, 어디서 울어’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아이는 그날 울음을 그치는 법이 아니라 삼키는 법을 배웠습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울음이 작은 가슴 안에서 한참을 들썩이다, 그대로 내려앉았습니다.
이처럼 가슴의 답답함은 지금 누워 있는 침실이 아니라, 까마득히 이른 시절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날 삼킨 것은 울음 하나였지만, 자라면서는 서운함도 화도 부탁도 같은 자리로 삼켜졌습니다. 정작 본인은 그런 날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니, 병원 검사만 거듭하며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이 친척 집 마루의 그 아이 곁으로 갔습니다. 이제는 울어도 괜찮다고, 울고 싶은 만큼 울어도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분의 눈에서 오래 묵은 울음이 쏟아졌고, 한참을 울고 난 뒤 길게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이 뚫린 것 같다고요.
괜찮다는 말 뒤에 눌러 둔 마음
몇 주 뒤 상담에서 그분이 전해 주신 변화는 두 가지였습니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워도 가슴에 돌이 얹히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늘 떠안기만 하던 회사 일을 처음으로 ‘이번에는 어렵겠습니다’ 하고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가슴이 조여 오지 않아서, 스스로도 놀랐다고 합니다.
검사 결과가 깨끗한 것은 다행한 일이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기계는 심장과 폐를 찍을 뿐, 근육의 긴장과 가슴에 눌러 둔 세월까지 찍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답답함이 계속된다고 해서 꾀병도, 엄살도 아닙니다. 무엇을 그렇게 오래 삼켜 왔는지 그 뿌리를 찾아 풀어 가면, 오래 눌려 온 가슴도 보통 한 달 내외에 회복되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서나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오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괜찮다’는 말 뒤에서 가슴이 밤마다 무거워진다면, 몸은 오래전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제 그 신호를 검사 수치가 아니라, 삼켜 온 마음 쪽에서 들어 볼 차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