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죄송한데, 이번 달은 제가 좀 어렵겠어요."
출근길 차 안에서 열 번도 넘게 소리 내어 연습한 말입니다. 건축자재 회사 회계팀에서 일하는 서른여덟 살 여성분은 그날만큼은 꼭 거절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석 달째 옆 팀 대리가 월말마다 자기 팀 경비 정산을 부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월말 결산으로 한창 바빴습니다.
오후 다섯 시 반, 대리가 영수증 뭉치가 든 서류철을 들고 그분 책상 앞으로 왔습니다. "과장님, 이번 달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연습한 말을 꺼내려는 순간 목 안쪽이 조여 오는 것 같았습니다.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았고 등에는 식은땀이 났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네, 거기 두고 가세요"였습니다.
대리가 역시 과장님밖에 없다며 돌아서자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습니다. 그날 그분은 밤 열 시까지 회사에 남아 옆 팀 영수증을 맞췄습니다. 집에 와서는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 저녁을 몇 숟가락 먹다 말았다고 합니다.
회사 밖에서도 비슷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가 밤 열한 시에 전화해 한 시간씩 하소연을 해도 먼저 끊자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 반 학부모 모임에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반대표를 맡았고, 올해로 세 번째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분만큼 착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은 좋아요. 그런데 돌아서면 제가 바보 같아요.” 그분은 자신을 원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착한사람 콤플렉스라는 말을 처음 보았을 때도 꼭 자기 이야기 같았다고 했습니다. 거절할 말까지 연습해 두었는데 왜 그 순간만 되면 ‘네’가 먼저 나올까요?
모니터 옆에 붙여 둔 한 줄
그분도 바꾸려고 애썼습니다. 거절하는 법을 다룬 책을 두 권 읽었고, “이번엔 어렵겠어요”라고 적은 포스트잇을 모니터 옆에 붙여 두었습니다. 거절할 말을 미리 정해 소리 내어 연습하는 것은 좋은 준비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필요를 분명하게 말하는 자기주장 훈련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잇에 적은 말은 정작 부탁하는 얼굴 앞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혼자 연습할 때는 술술 나오던 말이었습니다. 그분 말로는 목이 조여 오는 것이 먼저였고, '저 사람이 서운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그다음에야 떠올랐습니다.
부탁을 받는 순간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분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나’보다 ‘안 된다고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가 먼저라고 했습니다. 내 사정과 마음을 살핀 뒤 돕는다면 배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부터 걱정되고 몸이 굳는다면 거절 자체를 위험하게 받아들이는 반응일 수 있습니다.
'네'라고 해야 끊을 수 있는 전화
도식 이론에서는 상대의 뜻을 먼저 따르고 자신의 필요를 뒤로 미루는 반복 반응을 복종 도식이나 자기희생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관계에서 익힌 규칙이 어른이 된 뒤에도 비슷한 순간마다 저절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내 마음보다 상대의 뜻을 따라야 관계가 무사하다’는 규칙처럼 작용했습니다. 거절하려 하면 미안함과 불안이 올라왔고, ‘네’라고 답하면 그 불편이 곧 가라앉았습니다. 이때의 안도감 때문에 다음 부탁에서도 같은 대답이 먼저 나왔습니다.
휴대전화 요금제를 해지하려고 전화했는데, 여러 혜택을 듣다 지쳐 “그냥 계속 쓸게요” 하고 끊은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그 순간에는 마음이 놓이지만 요금은 다음 달에도 빠져나갑니다. 그분도 ‘사이가 틀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을 멈추려고 ‘네’라고 답했고, 떠맡은 일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거절할 말을 더 외우게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반응은 말을 고르기도 전에 목이 조이는 느낌으로 시작되어, ‘이번에는 꼭 말하자’는 결심이 끼어들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느낌에 집중하며, 이 반응과 이어진 어린 시절의 경험과 당시 눌러 둔 감정을 살펴봅니다.
큰집 거실을 끌려다니던 강아지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뒤, 대리가 서류철을 내밀던 오후를 다시 떠올려 보시게 했습니다. 목 안쪽이 좁아지는 느낌이 또렷해지자 그분은 침을 두어 번 삼키고 말했습니다.
"신발이 너무 많아요. 현관에 어른 신발이 잔뜩 있어요."
조금 있다가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제 손에 끈이 있어요."
할아버지 생신이라 친척들이 모인 큰집 거실입니다. 여자아이가 바퀴 달린 강아지 장난감의 끈을 쥐고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 아직 한 칸에 두 발을 모으던 무렵입니다. 끈을 당기면 강아지가 달그락거리며 따라오고 귀가 흔들립니다. 며칠 전 아빠가 사 준 장난감이라 아이는 어디를 가든 끌고 다녔습니다.
그때 한 살 어린 사촌 동생이 다가와 끈을 붙잡으며 "줘, 나 줘" 합니다. 아이는 끈을 등 뒤로 감추며 "싫어, 내 거야" 합니다. 거실이 잠깐 조용해지고, 엄마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습니다.
"동생한테 양보해야 착한 아이지." 둘러앉은 어른들의 눈이 모두 아이에게 와 있습니다.
아이는 끈을 쥔 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동생에게 내밉니다. 큰엄마가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하고,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어른들이 다시 웃고 떠들자 아이의 가슴이 조금 풀립니다. 하지만 눈은 방바닥을 끌려다니다 문턱에 자꾸 걸리는 강아지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울음이 올라올 때마다 침을 꿀꺽 삼킵니다.
그분은 아이가 끈을 등 뒤로 감추던 순간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른이 된 자신이 어린아이 뒤에 무릎을 꿇고 앉자, 끈을 꼭 쥔 작은 주먹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분은 아이에게 작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빠가 사 준 거라 주기 싫지. 아끼는 걸 지키고 싶은 건 나쁜 마음이 아니야. 강아지를 주고 나서 서운해도 괜찮아. 싫다고 했어도, 서운해해도 너는 사랑받는 아이야.”
말을 마치자 사촌 동생이 끈을 붙잡던 장면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동생은 이번에도 “줘” 하며 끈을 잡았고, 엄마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이 역시 한참 손을 내려다보다가 끈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을 조이며 울음을 삼키지 않았습니다. 눈가가 조금 젖은 채 ‘나 이거 좋아하는데’ 하는 서운함을 그대로 느꼈고, 칭찬을 들어야만 안심할 필요도 없었다고 합니다.
처음 장면을 말할 때 그분은 몇 번이고 침을 삼켰습니다. 같은 오후를 다시 경험한 뒤에는 침 삼키는 소리가 잦아들었고 목소리도 한결 차분해졌습니다.
강아지 장난감과 경비 정산은 전혀 다른 일이지만, 두 장면에서 그분은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싫다’는 마음이 올라오면 목이 먼저 조였고, 자신의 몫을 내준 뒤 착하다는 말을 들어야 안심했습니다. 상담에서는 양보한 일 자체보다 싫은 마음을 삼켜야 관계가 괜찮다고 느꼈던 반응을 다뤘습니다.
서류철이 되돌아간 월말
상담을 받은 뒤 맞은 월말, 대리가 또 서류철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대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이번 달은 제 결산이 밀려서 어렵겠어요. 정산 양식은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목이 살짝 조여 왔지만 말은 끝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대리는 "아, 네. 알겠습니다" 하고 서류철을 도로 들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분이 걱정하던 서운한 표정이나 어색한 침묵은 없었습니다. 그날은 여섯 시 반에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다 먹었다고 합니다. 모니터 옆 포스트잇은 그 주에 떼어 냈습니다.
그 주 금요일에는 새로 온 신입이 정산 프로그램 쓰는 법을 물어 왔습니다. 그분은 옆에 의자를 놓고 이십 분 넘게 차근차근 알려 주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도와주면서도 목이 답답했을 텐데, 이번에는 알려 주는 일이 즐거웠다고 합니다. 거절할 수 있게 되자 돕는 일도 떠밀려서가 아니라 자신이 고른 일이 되었습니다.
거절할 말을 연습해도 부탁 앞에서는 ‘네’가 먼저 나오고, 그럴 때마다 목이 답답하고 속이 얹힌다면 거절하는 요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싫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몸이 먼저 막아서는 것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 반응과 오래 눌러 둔 서운함을 함께 다루면, ‘네’와 ‘아니요’를 자신의 사정에 맞게 고르는 일이 한결 쉬워질 수 있습니다.
거절한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