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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 나 화장실 들렀다 갈게.”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쉬는 시간에 짝에게 한 말입니다. 짝은 매점에 같이 가자며 손을 내밀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교실 뒷문 앞에서 휴대전화를 보던 여학생 몇 명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학생은 숨을 멈췄고, 목덜미가 확 뜨거워지면서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학생은 앞문으로 빠져나가 화장실 칸에 들어갔습니다. 차가워진 손끝을 무릎 사이에 끼운 채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교실에 돌아온 뒤에도 한참 가슴이 쿵쿵 뛰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뒷문 앞의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웃었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학생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돌림을 당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몇몇 아이가 귓속말하며 웃었고, 체육 시간에는 짝이 되어 주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반 단체 사진을 찍는 날에는 맨 끝에 혼자 섰습니다. 3학년이 되어 반이 바뀌면서 괴롭힘은 멈췄고,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에는 그때의 아이들이 한 명도 없습니다.
학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닙니다. 하지만 여럿이 모여 웃는 소리만 들리면 몸부터 굳습니다. 점심은 급식실 줄이 다 빠진 뒤에 혼자 먹고, 쉬는 시간에는 이어폰을 끼고 엎드려 있습니다. 짝이 몇 번이나 먼저 말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피했습니다.
“그 애랑 친해지고 싶어요. 근데 가까워지면 또 그때처럼 될 것 같아서, 제가 먼저 피하게 돼요.”
어머니와 함께 상담실을 찾은 학생이 한 말입니다. 따돌림을 겪은 뒤 친구관계가 두려워진 학생과 부모님이라면 이 답답함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괴롭힘은 이미 끝났는데 왕따 후유증은 왜 오래 남는 걸까요?
웃음소리에 묶인 두려움
이 학생이 겪은 따돌림은 한 번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내내 여러 아이가 함께 웃고 귓속말을 나누며, 아무도 옆에 앉지 않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웃음소리와 귓속말, 무리 지어 선 아이들의 모습이 그때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연결되었습니다.
두려운 일을 겪을 때 곁에 있던 소리나 모습이 그 두려움과 연결되는 것을 조건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연결되고 나면 나중에는 비슷한 소리나 모습만으로도 몸이 긴장할 수 있습니다. 괴롭힘이 끝난 뒤에도 웃음소리와 귓속말 앞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유를 이런 과정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벌에 한 번 쏘인 사람은 한동안 귓가에 윙 소리만 나도 손부터 휘젓습니다. 파리 소리인지 선풍기 소리인지 따져 보기 전에 몸이 먼저 피합니다. 이 학생에게 교실의 웃음소리는 그 윙 소리와 같았습니다. 누가 왜 웃는지 알기도 전에 목덜미부터 뜨거워졌습니다.
다만 이런 반응을 모두 지나간 일의 영향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먼저 확인할 것은 지금도 괴롭힘이 이어지는지입니다. 누군가 지금도 놀리거나 따돌리고 있다면 마음을 다루기에 앞서 학교와 보호자가 나서서 안전부터 지켜야 합니다. 이 학생은 어머니와 담임 선생님이 함께 살펴보았고, 지금 반에서는 따돌림이 없었습니다. 현재 괴롭힘이 없는데도 무리 곁에서 몸이 굳는다면 지나간 따돌림과 연결된 반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괜찮다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굳을 때
학생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학교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 중학교 때 일을 처음으로 털어놓았고,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은 짝에게 먼저 인사하자는 목표도 세웠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리면 속으로 ‘내 얘기 아니야’를 세 번씩 되뇌었습니다.
인사는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웃음소리 앞에서는 여전히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얘기 아닌 거 머리로는 알거든요. 근데 그걸 떠올릴 즈음엔 이미 숨을 참고 있어요.”
겪은 일을 털어놓고 새로운 행동을 연습하는 상담은 상처를 정리하고 학교생활을 다시 꾸리는 데 힘이 됩니다. 이 학생에게 남은 어려움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내 얘기가 아니야’라는 생각은 목덜미가 뜨거워진 뒤에야 따라왔습니다. 되뇌는 말만으로는 이미 시작된 반응을 가라앉히기 어려웠습니다.
최면상담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나는 몸의 반응에서 시작합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웃음소리를 들을 때 느끼는 목덜미의 열감에 집중하면, 그 느낌과 연결된 경험과 당시의 감정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상담에서는 떠오른 경험 속 감정과 지금 반복되는 반응을 함께 살펴봅니다.
외가 평상에 쏟아진 미숫가루
깊은 최면 속에서 교실 뒷문 앞의 웃음소리를 떠올리자 학생은 얼굴과 목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 열감에 집중하던 중 뜻밖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모기향 냄새가 나요. 마당 평상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어요.”
여름밤의 외가 마당입니다. 평상 위에는 저녁상이 차려져 있고 외할머니와 이모, 외삼촌들이 빙 둘러앉아 있습니다. 평상에 오르려면 무릎부터 올려 기어올라야 하는 여자아이가 외할머니가 타 준 미숫가루 컵을 두 손으로 듭니다. 컵이 기우뚱하더니 미숫가루가 평상 위로 쏟아지고, 원피스 앞자락이 누렇게 젖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 웃음이 와르르 터집니다. 누군가 “평상에 미숫가루 강이 생겼네”라고 하자 웃음소리가 더 커집니다. 아이는 젖은 원피스를 내려다본 채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어른들은 아이를 볼 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침상에서는 누군가 “오늘은 컵 조심”이라고 웃고, 저녁에 들어온 외삼촌은 빈 컵을 아이 손에 쥐여 주는 시늉으로 모두를 웃깁니다. 아이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말합니다. “농담인데 뭘 그래.”
외가에 머무는 동안 마루에서 어른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리면 아이는 놀던 손을 멈추고 어른들 얼굴을 하나씩 살폈습니다. 학생은 얼굴들은 흐릿했지만 웃음소리만은 또렷했다고 말했습니다.
농담이어도 싫다고 느낄 수 있어
학생은 최면 속에서 젖은 원피스를 입은 아이에게 다가가 평상 모서리에 함께 앉았습니다. 미숫가루가 묻은 소매를 가만히 걷어 주며 말했습니다.
“네 손에는 컵이 너무 크고 무거웠어. 그만한 손으로 들면 누구라도 쏟을 수 있어. 어른들은 미숫가루가 쏟아진 일을 두고 웃고 농담했지만, 그 웃음이 네가 우스운 아이라는 뜻은 아니야.”
“그래도 너는 싫었지. 농담이어도 싫을 수 있어. 싫다고 고개를 돌린 건 잘못한 게 아니고, 사람들이 계속 웃는다고 네 느낌이 틀린 것도 아니야. 웃음이 들려도 모두 네 이야기는 아니니 먼저 숨거나 떠나지 않고 무슨 일인지 살펴봐도 돼.”
지금의 학생에게 그때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들은 아이는,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마음에 둔 채 미숫가루를 쏟은 저녁과 그 뒤의 며칠을 다시 겪어 보았습니다. 미숫가루는 똑같이 쏟아졌고 어른들의 웃음과 농담도 그대로였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농담이어도 싫을 수 있고, 사람들이 웃는다고 모두 나를 비웃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이해하자 목덜미의 열감은 금세 가라앉았고 숨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싫은 마음이 들어도 그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외가에서 아이는 여럿이 웃을 때마다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지 어른들의 얼굴부터 살폈습니다. 싫다는 표정마저 농담으로 넘어가면서 부끄러움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최면에서는 이 장면 뒤에도 여러 사람의 웃음이 들리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지부터 살피고 자리를 피했던 경험들을 이어서 다뤘습니다. 웃음의 이유를 확인하기도 전에 모두 자신을 향한 비웃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불편하면 그 마음을 알아차린 채 곁에 머물 수 있다는 이해를 되짚었습니다. 중학교의 따돌림은 그 자체로 큰 상처였으며, 어린 경험이 그 폭력을 불러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럿의 웃음을 자기 이야기와 연결해 경계하던 반응은 따돌림을 겪으며 한층 강해진 것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짝의 손을 잡고 매점으로 간 날
짝이 다시 매점에 가자며 손을 내민 날, 뒷문 앞에는 그날처럼 몇몇 아이가 모여 웃고 있었습니다. 목덜미가 잠깐 따뜻해졌지만 학생은 짝의 손을 잡고 그 앞을 지나갔습니다. 매점에서는 “너 뭐 먹을래?”라고 먼저 물었습니다. 둘은 바나나우유를 하나씩 사서 계단에 앉아 마셨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에도 급식실 줄이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짝과 짝의 친구들 틈에 서서 식판을 받고, 옆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지면 무슨 일인지 같이 고개를 돌려 봅니다.
체육대회 날 반 단체 사진을 찍을 때는 맨 끝이 아니라 짝 옆 둘째 줄에 섰습니다. 사진을 찍어 주던 선생님의 농담에 반 전체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고, 학생도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그 사진은 지금 학생의 휴대전화 배경 화면에 들어 있습니다.
교실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질 때마다 숨부터 참고 있지는 않나요? 괴롭힘은 끝났는데 그 순간만큼은 아직 그때의 교실에 서 있는 것처럼 몸이 굳는다면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곁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이라면 친구를 더 사귀어 보라고 말하기 전에 지금 괴롭힘이 없는지부터 함께 확인해 주세요. 괴롭힘이 없는데도 두려움이 이어진다면 웃음소리에 몸이 먼저 굳고 사람들 곁을 피하는 반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상담은 친구가 내민 손을 피하지 않고 관계를 다시 이어 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둡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