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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것 좀 봐 봐. 내가 쓴 말, 화난 것처럼 보여?”
밤 열한 시가 넘어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휴대폰을 들고 안방 문을 열었습니다. 친한 친구들과 넷이 쓰는 단톡방에 토요일에 갈 떡볶이집 주소를 올린 지 이십 분이 지난 뒤였습니다. 메시지 옆에 떠 있던 안 읽은 사람 수는 금세 사라졌는데,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면을 들여다볼수록 가슴이 빨리 뛰고 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합니다.
사실 그 메시지는 보내기 전에 네 번이나 고쳐 쓴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자주 쓰는 말투로 바꾸고, 반응을 제일 많이 받는 친구가 즐겨 쓰는 이모티콘도 붙였습니다. 엄마가 “다들 씻나 보지”라고 하자 방으로 돌아가 “아님 말고ㅋㅋ”를 덧붙였습니다. 그러고도 새벽 한 시가 넘도록 휴대폰을 몇 번이고 다시 켰습니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 그중 한 친구가 이어폰을 낀 채 고개만 까딱했습니다. 그 표정이 1교시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선생님의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이 왜 웃는지도 모른 채 따라 웃었고, 이동 수업 때는 누가 누구와 나란히 걷는지부터 살폈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친구들은 학원 수업이 늦게 끝나 답을 못 했고, 이어폰을 낀 친구는 전날 잠을 설쳐 기운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마음은 놓였지만 이미 하루가 다 지나간 뒤였습니다.
“저도 알아요, 별일 아니라는 거. 그런데 답이 안 오면 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뛰어요. 제가 너무 예민한 거죠?”
따돌림을 당한 적도, 친구와 크게 다툰 적도 없었습니다. 청소년 친구관계에서 답장이 늦거나 인사가 짧은 날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대부분은 금방 잊고 지나가지만, 이 학생에게는 그런 날들이 친구관계 스트레스로 쌓여 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단톡방에서 답이 오지 않아도 어떤 아이는 그대로 잠들고, 어떤 아이는 새벽까지 화면을 켰다 끕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요?
‘바쁜가 보다’보다 ‘내가 뭘 잘못했나’가 먼저라면
친구의 답이 늦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을 살펴보세요. ‘다들 바쁜가 보다’인지, ‘내가 뭘 잘못했나’인지에 따라 그 뒤의 하루가 달라집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가 먼저 떠오르고,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여러 번 고쳐 쓰거나 보낸 뒤에도 자꾸 확인한다면 친구의 반응을 관계의 신호로 크게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신호에 빠르고 크게 반응했습니다. 친구 관계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크게 느끼는 청소년기에는 이런 반응이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향이 강하면 늦은 답장이나 짧은 인사처럼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반응을 ‘나를 멀리하려는 신호’로 먼저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메시지를 다시 열어 보고 친구의 얼굴을 살피며, 잠들기 전까지 그 장면을 곱씹게 됩니다. 이런 하루가 쌓이면 또래관계 스트레스가 커지고 친구와 지내는 일 자체가 조심스러워집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제 순위가 매일 바뀌는 것 같아요. 오늘은 누가 제일 반응을 많이 받았는지, 저는 몇 번째쯤인지 자꾸 따져 보게 돼요.”
이 학생에게는 친구의 답장 속도와 표정 하나하나가 관계의 상태를 알려 주는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잠시 답이 없거나 표정이 달라 보이면 그 뜻을 확인할 때까지 마음을 놓기 어려웠습니다.
알림을 꺼도 다시 열게 되는 단톡방
이 학생도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단톡방 알림을 끄고, 잠들기 전에는 휴대폰을 거실에 두기로 엄마와 약속했습니다. 알림을 끄는 일은 확인하는 횟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림이 오지 않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더 궁금해져, 오히려 앱을 여는 횟수가 늘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 담임 선생님은 친구가 많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였습니다. 학생도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단톡방이 조용해지면 그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볼이 먼저 달아올랐습니다.
친구의 침묵 앞에서 가슴이 뛰는 것은 생각해서 고른 반응이 아닙니다. 생각이 끼어들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렇게 의식보다 앞서 일어나는 자동반응을 살펴봅니다.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반응에 집중하면서, 그 느낌과 이어진 오래된 경험과 감정을 찾아가는 방식입니다.
생선 살이 먼저 올라간 숟가락
최면이 깊어진 뒤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주의를 모으자, 학생은 “밥상이에요. 아빠가 생선 가시를 바르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곧이어 “이게 왜 나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다리가 긴 아기 의자에 앉아야 식탁에 손이 닿던 무렵의 저녁입니다. 식탁에는 아빠와 엄마, 두 살 위 오빠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아이는 숟가락으로 국을 휘저으며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그때 아빠가 오빠를 보며 “우리 큰아들은 어쩜 이렇게 의젓하게 잘 먹을까” 하고는, 가시를 발라낸 생선 살을 오빠 숟가락 위에 올려 줍니다.
아이는 노래를 멈춥니다. 볼이 뜨거워지고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갑니다. 오빠를 흘끔 본 아이는 오빠처럼 등을 곧게 펴고, 입을 꼭 다문 채 오물오물 밥을 씹습니다. 그제야 아빠가 “우리 막내도 잘 먹네” 하며 생선 한 점을 아이 숟가락에 얹어 줍니다.
아이 얼굴이 환해집니다. 하지만 밥을 먹는 내내 눈은 아빠 손끝을 따라다닙니다. 조금 뒤 오빠가 “잘 먹었습니다” 하고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자 엄마가 “역시 오빠네” 하며 웃습니다. 아이는 밥이 반이나 남았는데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며 “나도 잘 먹었습니다” 하고 따라 말합니다.
학생은 최면 속에서 열다섯 살 모습 그대로 그 아기 의자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아빠 손끝을 좇느라 바쁜 아이의 뜨거운 볼에 손바닥을 가만히 대고 말했습니다.
“오빠한테 먼저 가서 서운했구나. 아빠는 오빠가 의젓하게 먹는 게 기특해서 칭찬한 거야. 아빠가 잠깐 오빠를 보고 있어도 너는 밀려난 게 아니야. 지금은 입에 있는 생선 맛을 봐도 돼.”
지금의 학생에게 그때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들은 아이는,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마음에 둔 채 그 저녁을 다시 겪어 보았습니다. 생선 살은 이번에도 오빠 숟가락에 먼저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아빠가 오빠를 먼저 본다고 내가 밀려난 것은 아니구나’라고 알게 되자, 오빠처럼 행동해 다시 관심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볼은 잠깐 따뜻해졌다가 금세 식었고, 눈도 아빠 손끝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입안에 남은 생선의 고소한 맛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밥상과 단톡방은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러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볼이 달아오르고, 상대에게 행동을 맞춘 뒤 다시 자신을 봐 주는지 살피는 모습은 닮아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투로 메시지를 고쳐 쓰고 누구의 말에 답이 달리는지 확인하던 행동도 이 반응과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엎어 둔 휴대폰과 이어폰 한쪽
상담을 마치고 맞은 어느 토요일 밤, 학생은 단톡방에 다음 주에 같이 영화를 보자는 메시지를 올렸습니다. 한동안 답이 없자 볼이 살짝 따뜻해졌지만, 메시지를 고치거나 “아님 말고”를 덧붙이지는 않았습니다. 휴대폰을 책상에 엎어 두고 머리를 감으러 갔고, 머리를 다 말린 뒤 확인해 보니 답이 세 개 와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에는 안방 문을 열고 휴대폰을 내밀 일이 없었습니다.
영화를 고를 때도 달라졌습니다. 두 친구가 공포 영화를 보자고 하자, 예전 같으면 “나도 좋아!”부터 보냈을 겁니다. 이번에는 “나 공포 영화 진짜 못 봐ㅠ 애니메이션은 어때?”라고 적었습니다. 결국 공포 영화로 정해졌지만 그 대화를 밤새 다시 읽지는 않았고, 영화관에서는 큰 팝콘을 안고 무서운 장면마다 눈을 가렸다고 합니다.
월요일 아침, 그 친구가 또 이어폰을 낀 채 고개만 까딱했습니다. 학생은 가방을 내려놓고 1교시 교과서를 폈고, 쉬는 시간이 되자 먼저 다가가 “뭐 들어? 나도 한쪽만” 하며 이어폰 한쪽을 받아 끼웠습니다. 둘은 종이 칠 때까지 같은 노래를 들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휴대폰을 엎어 둘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 빨리 답해 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답이 오기 전부터 가슴을 뛰게 하던 반응이 잦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보낸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열어 보고 있다면, 혹은 그런 자녀를 곁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친구가 왜 답을 안 하는지부터 따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몸에서 먼저 일어나는 반응을 살펴봐 주세요. 신경 쓰지 말자는 다짐보다 앞서 가슴을 뛰게 하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함께 다루면, 단톡방과 교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도 하루가 통째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