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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깊이 끌어 쉽니다. 들이쉬어도 들이쉬어도 가슴 끝까지 차오르지 않는 느낌. 하품을 억지로 끌어내듯 입을 벌려 보고, 창문을 열고, 단추를 풀어 봐도 어딘가 한 뼘이 모자랍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한 뼘이 통째로 사라집니다.
밀린 일을 붙들고 있던 평일 오후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목이 조이듯 숨이 턱 막히고, 아무리 들이쉬어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지럽고, 손끝이 찌릿찌릿 저려 오고, 이러다 이대로 숨이 멎는 건 아닌가 싶었답니다. 폐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폐암 걱정까지 안고 호흡기내과를 찾았습니다.
“엑스레이도, 폐 기능 검사도, 심장까지 다 괜찮대요. 폐는 정상이라는데, 그럼 저는 왜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막히는 건가요? 요즘은 숨 쉬는 게 무서워요.” 서른 후반의 사무직 한 분은, 그날 이후 숨 쉬는 일이 하나의 ‘일’이 되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잘 쉬어지는지 온종일 살피고, 조금만 달리는 느낌이 들면 멈춰 서서 또 깊은 숨을 끌어 쉬고요.
숨이 모자란 게 아니라 넘쳐서 생기는 일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숨이 차는 증상이 계속되면 폐와 심장의 문제부터 병원 검사로 가려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검사에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숨 막힘과 호흡곤란이 되풀이되고, 어지러움과 손발 저림까지 따라온다면 과호흡증후군,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불안과 공황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여기에는 뜻밖의 역설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그 숨 막힘은 공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숨을 너무 많이 쉬어서 생기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풍선을 쉬지 않고 연달아 불면 머리가 핑 도는 것을 겪어 보셨을 겁니다. 숨을 빠르고 깊게 몰아쉬면 몸속 이산화탄소가 지나치게 빠져나가 혈액의 균형이 알칼리 쪽으로 기울고, 그 탓에 어지럽고 손발이 저리고 가슴까지 답답해집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지럽고 저릿한 그 느낌이 ‘정말 큰일이 났다’는 확신을 키우고, 놀란 몸은 숨을 더 급하게 몰아쉽니다. 숨이 넘칠수록 증상은 심해지고, 증상이 심해질수록 숨은 더 과해지는 악순환입니다. 숨이 차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서 숨이 차지는 쪽에 가깝습니다.
숨을 몰아쉬게 만드는 무의식의 경보
그렇다면 애초에 무엇이 호흡을 몰아쉬게 만들까요. 우리 몸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권한을 쥔 자리가 있습니다. 뇌 깊숙이 들어앉은 ‘편도체’입니다. 편도체가 위험 신호를 포착하면 몸은 달아날 준비부터 하고, 근육에 산소를 대려고 호흡부터 가빠집니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도 잠자리에서도, 그 경보가 울리면 몸은 전력 질주를 앞둔 것처럼 숨을 끌어모읍니다.
이 경보 장치는 우리에게 묻지 않고 울립니다. 의식이 끼어들 틈 없이, 무의식의 깊이에서 제멋대로 켜집니다. ‘폐는 멀쩡하다는데 천천히 쉬자’고 다짐해 봐도 번번이 무너지는 까닭이 그것입니다. 다짐은 의식의 일이고, 경보는 무의식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처방받은 약으로 한숨 돌리고 있었습니다. 약은 곤두선 편도체를 가라앉혀 경보가 덜 울리게 도와주지만, 편도체가 무엇 때문에 숨에 그토록 예민해졌는지 그 출발점까지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출발점은 무의식에 있고, 최면상담은 바로 그 무의식을 직접 다룹니다. 깊은 최면으로 들어가, 편도체가 숨을 처음 ‘목숨이 걸린 일’로 새겼던 순간을 찾아봅니다.
최면 속에서 닿은 어린 날의 겨울밤
그분과도 그 순간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발작 때의 그 느낌, 숨이 막혀 이대로 사라질 것 같던 느낌을 따라가자, 도착한 곳은 사무실도 병원도 아닌 아주 어린 날의 겨울밤이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아기가 어른들 곁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추운 밤이라 식구들은 두꺼운 솜이불을 끌어다 아기 턱밑까지 덮어 주었습니다. 잠결에 뒤척이던 아기는 어느 순간 이불 속으로 파묻혔고, 무거운 솜 더미가 코와 입을 막았습니다. 팔다리를 버둥거려도 이불은 꿈쩍하지 않고, 숨은 점점 짧아지고, 울음소리조차 솜에 먹혀 들어갔습니다. 곁에 식구들이 있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채였습니다.
잠시 뒤 인기척에 깬 어른이 이불을 걷어 주었고, 아기는 새파래진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른들에게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잊힌 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몇 초 사이, 말도 배우기 전의 아기에게는 ‘숨이 막히면 나는 이대로 사라진다’는 공포가 새겨졌습니다. 그날 이후 무의식은 숨을 감시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계단을 오르거나 긴장하거나 술 마신 다음 날, 숨이 조금만 달려도 편도체는 그 겨울밤이 돌아온 줄 알고 비상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숨 막힘의 뿌리는 폐가 아니라, 숨이 정말로 막혔던 까마득한 한순간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에는 없고 몸에만 남은 일이라, 본인으로서는 아무리 짚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그분은 어른이 된 자신의 손으로 그 솜이불을 걷어 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아기를 안아 올려 숨길을 틔워 주고, 너는 그날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껏 잘 숨 쉬며 살아왔다고, 숨은 너를 배신한 적이 없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무의식이 수십 년 움켜쥐고 있던 그 밤을, 그렇게 내려놓게 했습니다.
가족이 먼저 알아챈 조용한 변화
달포쯤 지나, 그 변화를 본인보다 가족이 먼저 알아챘다고 합니다. 어느 저녁 식탁에서 배우자가 “당신 요즘 한숨을 통 안 쉬네” 하더랍니다. 그 말에 돌아보니 어깨로 숨을 끌어 쉬던 버릇도, 잘 쉬어지는지 온종일 살피던 일도 어느새 잊고 지내고 있었다고요.
숨이 자꾸 차고 막히는 것은 폐가 약해서도, 마음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에 한 번 크게 혼이 난 경보 장치가, 지금껏 숨을 너무 열심히 지키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멀쩡하다는 검사 결과와 자꾸 막히는 숨 사이에서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은 일은 그 경보가 처음 울렸던 자리, 무의식의 까닭을 찾아 푸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풀고 나면 오래 막혀 온 숨도 차츰 트이고, 한 달 내외에 회복되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 한 번만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어깨가 올라가 있지는 않은지, 숨을 반쯤 참은 채 읽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그 숨에는 폐 사진에 찍히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찾아서 풀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