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남편이 퇴근길에 제가 좋아하는 단팥빵을 사 왔어요.
봉지를 받아 드는데 명치가 딱딱하게 굳고 손끝이 차가워지더라고요.
그날 밤에 가방 안쪽에 넣어 둔 이혼 서류를 또 꺼내 봤어요.
그런데 남편이 말없이 등을 돌리고 자는 밤에는, 헤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요.
제가 뭘 원하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한 분은 결혼 십 년 차, 초등학생 딸을 둔 서른여덟 살 학원 상담실장입니다. 지난겨울 남편이 상의도 없이 적금을 깨 친구의 사업 자금으로 빌려주었고, 그 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이혼해야 할지 고민하는 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혔습니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고 저녁 차리는 것을 도와주거나 주말 나들이를 권하는 날에는 마음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반대로 남편이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고 등을 지고 돌아눕는 날에는 새벽 세 시에 잠이 깨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렇게 새벽에 깨어난 다음 날 아침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부터 끓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굴었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돈 문제가 생기기 전에도 이런 양상은 비슷했다고 합니다. 신혼 무렵에도 남편이 유난히 살갑게 구는 날이면 괜히 말꼬리를 잡아 시비를 걸다가 싸움이 커지곤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은 이혼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이혼 고민이 길어질 때 결정이 왜 자꾸 뒤집히는지, 그 흔들림에 오래된 마음속의 무의식 자동반응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한 분의 사례로 살펴봅니다.
다정한 날일 수록 길어지던 단점 목록
그분은 이혼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공책을 펴고 남편의 장점과 단점을 나눠 적은적이 있습니다. 석 달 동안 세 번 썼지만, 쓸 때마다 결론이 달랐습니다. 이상하게도 남편이 유난히 다정했던 날에는 장점 보다 단점 칸이 길었고, 남편이 하루 종일 말이 없고 무심하게 굴던 날에는 장점 칸이 더 길었습니다.
“이상하죠. 남편이 잘해 준 날에 떠날 이유가 더 많이 떠올라요.”
결정이 어려울 때 장단점을 적거나 믿을 만한 사람에게 속을 털어놓으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부부 상담으로 막힌 대화를 다시 열어 보거나 법률 상담으로 절차와 조건을 알아보는 일도 결정에 보탬이 됩니다. 그분도 친구에게 여러 번 털어놓았고 법률 상담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알아본 내용이 늘어도 결론은 여전히 남편의 그날 태도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다면 일주일쯤 달력에 두 가지를 적어 보셔도 좋습니다.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든 날과 그날 배우자가 보인 태도입니다. 배우자가 잘해 준 날 오히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지금 부부 사이의 문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마음속의 자동반응이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내 마음이 언제 흔들리는지 알아보기 위한 기록입니다.
맑은 날에도 우산을 놓지 못하는 사람
애착 이론에서는 어릴 때 가까운 사람과 지내며 익힌 ‘가까운 관계는 이렇게 흘러간다’는 예상을 '내적 작동모델'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관계에 대한 기대는 상대의 다정함과 차가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남편이 잘해 주면 이번엔 언제 끝날까 싶어요. 차라리 제가 먼저 끝내는 게 덜 아플 것 같고요.”
소나기가 잦은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은 하늘이 개어도 우산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볕이 좋을수록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우산을 더 꽉 쥐기도 합니다. 지금 하늘보다 오래 겪으며 익힌 예상이 먼저 손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남편의 다정함은 곧 차가움이 올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잘해 줄수록 다치기 전에 먼저 끝내고 싶어졌고, 남편이 차가워지면 이번에는 정말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올라왔습니다. 두 반응이 번갈아 나타나니 결정도 그때마다 뒤집혔습니다.
그분은 ‘감정 말고 사실만 보고 정하자’고 여러 번 다짐한 적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단팥빵 봉지를 받는 순간 명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굳었습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니 다짐이나 목록만으로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몸이 먼저 굳는 반응은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최면상담에서는 명치가 굳는 감각에 집중합니다. 깊이 최면 상태에서 그 감각과 이어지는 경험을 살피고, 그때 남은 감정을 다룹니다. 이혼을 할지 말지를 상담에서 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을 흔드는 무의식 자동반응을 덜어 내고, 남은 부부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는 것이 최면상담의 목표입니다.
엄마 무릎 위에서 웃던 아이
깊은 최면에 들어간 뒤, 그분은 단팥빵 봉지를 받던 순간의 굳은 명치를 다시 느껴 보았습니다. 한참 뒤 그분이 꺼낸 첫마디는 뜻밖에도 웃음 섞인 목소리였습니다.
“엄마가 제 배에 입을 대고 푸우 불어요. 간지러워서 웃음이 멈추질 않아요.”
아직 ‘엄마’, ‘또’ 정도만 말하던 때였습니다. 오후 햇빛이 드는 거실 바닥에서 엄마는 아이를 무릎에 눕히고, 아이 배에 푸우 소리를 내며 장난을 쳤습니다. 아이가 “또!” 하고 조르면 엄마는 한 번 더 불어 주었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신나게 놀아 주다가도 별것 아닌 일에 얼굴이 차가워지곤 했습니다.
까르르 웃음이 가장 커졌을 때 아이의 웃음이 뚝 끊기고 배가 단단해졌습니다. 아이는 엄마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본 뒤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창가 구석으로 기어가 혼자 장난감 실로폰을 두드렸습니다.
엄마가 “벌써 그만해?” 하고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 실로폰 소리가 커지자 엄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아, 시끄러워.”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아이는 실로폰 채를 쥔 채 닫힌 문 앞으로 가서 숨을 죽이고 앉았습니다.
여기까지 떠올린 그분은 깊은 최면상태에서 닫힌 방문 앞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는 아이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혼자가 된 아이가 왜 그렇게 겁을 먹었는지 마음을 알아주었습니다.
“엄마랑 웃고 노는 게 정말 좋았지? 그런데 엄마 얼굴이 갑자기 달라질때는 놀라고 무서웠지? 하지만 네가 크게 웃어서 엄마가 차가워진 게 아니야. 실로폰을 친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야."
"엄마 기분은 엄마꺼라서 엄마 기분이 바뀌는 것은 네가 어떨게 할수도, 어떻게 할 필요도 없단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갔다고 너를 버린 것도 아니야. 엄마가 차가워지기 전에 네가 먼저 물러날 필요도 없고, 문 앞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릴 필요도 없어. 네 기분은 네 것이고 안전하니까, 엄마 기분이 어떻게 바뀌든 휘둘릴 필요 없단다. 편하게 있어도 괜찮아.”
아이에게 이런 말을 전한 뒤에, 그분은 어린시절의 자신이 되어 그날의 오후를 다시 체험해 보았습니다.
엄마는 전처럼 아이의 배에 입을 대고 장난을 쳤고, 아이도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그러다 엄마는 갑자기 얼굴 표정이 굳었고, 아이는 아이는 엄마 무릎에서 내려와 실로폰을 두드렸습니다.
일어난 일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기분이 바뀌거나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도 자신이 버려진다는 걱정이나 불안 없이 한결 편하게 그 순간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그 순간을 다시 경험하면서 아이는 웃음을 갑자기 멈추지도 않았고, 엄마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방문 앞에서 숨을 죽인 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 장면에 이어, 가까워지면 먼저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 잃을까 두려워 기다렸던 다른 경험이나 장면들도 최면 중 함께 다뤘습니다.
식탁에서 나눠 먹은 단팥빵
최면상담 후 달라진 점은 남편의 태도에 따라 결론이 곧바로 뒤집히지 않게 된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시 단팥빵 봉지를 들고 현관에 들어선 날이 있었다고 합니다. 봉지를 받아 든 그분은 “고마워” 하고 식탁에 앉아 빵 하나를 반으로 갈라 남편과 나눠 먹었습니다. 딸의 학교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명치는 굳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피곤하다며 “내일 얘기해” 하고 돌아누운 밤도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래, 내일 저녁에 하자”고 답했고, 숨이 막히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된장찌개 대신 늘 먹던 대로 토스트를 구웠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그분은 큰돈이 드는 일은 앞으로 둘이 함께 정하자고 말했고, 남편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 약속은 직접 메모지에 적어 냉장고 문에 붙였습니다. 가방 안쪽의 이혼 서류는 서랍으로 옮겼지만 버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잘해 준 저녁에는 오히려 떠날 궁리를 하고, 차가워진 밤에는 헤어질 생각만으로 숨이 막힌다면 그때마다 무엇이 판단을 흔드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진 자동반응이 지금의 결정에 끼어들고 있다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앞서 그 반응을 다루는 것이 필요할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