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싸우고 한두 시간쯤 지나면 아내가 먼저 방에 들어와서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어’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고 귀가 확 달아오르고, 휴대전화를 쥔 손바닥에 땀이 배요. 고맙다는 말은 안 나오고 ‘이제 와서 왜? 이번엔 또 뭔데’ 소리부터 나가요. 그러면 아내 얼굴이 굳고, 싸움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돼요.”
마흔네 살인 그분은 치과 기공소에서 보철물을 만듭니다. 결혼한 지 열한 해, 초등학생 남매를 두었습니다. 부부싸움이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번 붙으면 사흘씩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싸움 끝에 아내가 “당신이랑은 화해가 안 돼” 하며 우는 모습을 보고, 그분은 혼자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부부가 자꾸 싸우는 이유를 찾을 때는 무엇 때문에 다퉜는지부터 따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몇 년째 비슷한 싸움이 반복된다면, 싸움이 끝나 가는 순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아내가 화해하려고 다가올 때마다 다툼이 다시 커졌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순간의 반응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주제는 달라도 끝은 늘 같았던 싸움
첫 상담에서 그분은 늘 같은 문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설거지나 분리수거 같은 집안일 이야기만 나오면 다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세 번의 싸움을 돌아보니 주제는 서로 달랐습니다. 설거지, 아이의 태블릿 사용 시간, 늦은 귀가에 연락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반복된 것은 싸움의 순서였습니다. 아내가 서운한 점을 말하면 그분은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하고 받아쳤습니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먼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한두 시간 뒤 아내가 풀어 보려고 찾아오면 날 선 말이 나왔습니다. 사과까지 거절당했다고 느낀 아내가 울거나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툼은 더 커졌습니다.
두 사람은 싸움을 줄이려고 “싸움은 그날 안에 풀자”고 약속했습니다. 대화법 책도 함께 읽고, 서로를 탓하는 대신 서운한 마음을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그날 안에 풀려고 먼저 다가올수록, 싸움이 다시 커지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지난 몇 번의 부부싸움을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지와 함께, 어느 순간 다시 커졌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특히 한쪽이 화해하려고 다가올 때마다 다툼이 되살아났다면 그때의 반응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소품만 바뀌고 대본은 그대로인 싸움
심리학에서는 어릴 때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마음의 기준을 ‘도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준은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가령 미안하다는 말 뒤에 다시 큰소리가 나던 경험이 반복됐다면, 사과를 들어도 생각보다 먼저 몸이 긴장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부에게도 서로의 반응이 맞물렸습니다. 그분이 날 선 말로 답하면 아내는 사과마저 무시당한 듯 서운했고, 아내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그분은 ‘역시 사과는 말뿐이었어’라고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반응에 다시 상처받으며 같은 싸움으로 돌아갔습니다.
설거지, 태블릿, 귀가 연락처럼 싸움의 주제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서운함을 말하고, 그분이 방으로 들어갔다가, 아내의 사과에 날 선 말로 답하는 순서는 비슷했습니다. 화해가 어긋나는 동안 설거지 문제도 끝까지 이야기하지 못해, 다음 싸움에서 다시 불거졌습니다.
“아내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다음 말이 더 겁나요. 이번엔 또 뭘 따지려고 저러나 싶고요.”
그분은 다음에는 “고마워”라고 답하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귀가 달아올랐습니다. 마음먹은 말은 이미 날 선 대답이 나가고 아내의 얼굴이 굳은 뒤에야 떠올랐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순간의 말을 억지로 참는 대신, 반응이 시작될 때의 몸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함께 떠오르는 경험과 감정을 살핍니다. 부부갈등을 다룰 때도 각자의 반응과 경험은 한 사람씩 살펴봅니다.
왜 아내가 화해하러 올 때마다 몸이 먼저 긴장했을까요? 최면 중 그분이 떠올린 것은 결혼생활이 아닌, 두 손으로 과자 봉지를 받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뜯지 못한 과자 봉지
최면이 충분히 깊어지자 그분은 아내가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어” 하던 저녁을 떠올렸습니다. 귀가 달아오르고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느낌에 한동안 머물러 있던 그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과자 봉지를 들고 있어요. 아빠가 준 건데……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과자 봉지를 아직 혼자 뜯지 못하는 남자아이가 안방 문턱에 서 있습니다. 조금 전 텔레비전 앞을 가로막았다가 아빠에게 크게 혼난 아이는 울음을 참으며 코를 훌쩍입니다. 잠시 뒤 동네 가게에 다녀온 아빠가 웃으며 과자 봉지를 내밉니다. “아빠가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이거 먹어.”
아이는 두 손으로 봉지를 받습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비닐이 자꾸 미끄러집니다. 아빠가 봉지를 뜯어 주자 아이는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부스러기 몇 개가 방바닥에 떨어집니다. “흘리지 말라니까!” 아빠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아이는 과자를 입에 문 채 그대로 굳습니다.
아빠가 크게 화를 낸 날은 대개 비슷했습니다. 큰소리가 난 뒤 과자나 장난감을 주었지만, 조금 지나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웃으며 무언가를 건넬 때도 얼굴부터 살폈습니다. 아빠가 왜 자주 화를 냈는지는 최면 중에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문턱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의 작은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습니다. 코를 훌쩍이던 소리가 잦아들자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했어도 다시 소리를 지를 때가 있어. 과자를 조금 흘렸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들을 일은 아니야. 과자는 먹어도 돼.”
그분은 다시 문턱에 선 아이가 되어 같은 오후의 일을 겪었습니다. 아빠는 똑같이 “미안해, 이거 먹어” 하며 과자를 건넸습니다. 이번에는 봉지를 받는 손바닥에 땀이 나지 않았습니다.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아빠는 또 “흘리지 말라니까!”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움찔했지만 몸은 곧 풀렸고, 입안의 과자는 끝까지 달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한 뒤에도 다시 소리칠 수 있다는 것을 겪었습니다. 아내의 사과를 들을 때 손바닥에 땀이 차고 “이번엔 또 뭔데”라는 말이 나온 모습도 그때의 경계와 닮아 있습니다. 상담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곧 다음 큰소리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예상하던 반응을 다뤘습니다. 비슷한 경계가 남아 있던 다른 경험들도 최면 중 이어서 살피며, 사과와 그 뒤의 행동을 한 덩어리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새롭게 이해해 갔습니다.
설거지 당번이 처음 정해진 밤
상담을 마친 뒤에도 다툼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저녁 또 설거지 문제로 언성이 높아졌고, 그분은 먼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아내가 방문을 열고 “아까는 내가 너무 몰아붙였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습니다. 가슴은 차분했고 귀도 달아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나도 말이 거칠었어.” 아내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고, 두 사람은 몇 년째 결론을 내지 못한 설거지 문제를 끝까지 이야기했습니다. 평일 저녁은 그분이, 주말은 아내가 맡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태블릿 시간을 두고 말이 엇갈린 날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이 먼저 거실로 나가 아내 옆에 앉아 “아까 내가 말을 끊었지. 미안해” 하고 말을 걸었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아내가 방문을 열 때까지 나오지 않았을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사흘씩 이어지던 냉랭한 침묵도 없었습니다.
지난번 부부싸움은 어느 순간 다시 커졌나요? 배우자가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날 선 말이 먼저 나왔다면, 그 순간 무엇을 예상했고 몸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는 사과를 들을 때 올라오던 경계를 다룬 뒤, 두 사람이 다툰 문제를 끝까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