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구야?” 저녁 식탁에 엎어 둔 남편의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리자 그 말부터 튀어나왔습니다. 남편은 화면을 뒤집어 보여 주었습니다. 택배가 문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였습니다. 아내는 “미안, 그냥 물어본 거야” 하고 웃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슴은 이미 쿵 내려앉아 있었고, 숟가락을 쥔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눈앞에는 일 년 전 그 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야근이라며 늦게 들어온 남편이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식탁 위 휴대전화 잠금화면에 ‘오늘도 고마웠어’라는 메시지가 뜨던 장면입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 화면은 몇 번이고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에는 불을 끄고 누운 뒤에도 한참 동안 눈을 감지 못했습니다.
구청 민원실에서 일하는 마흔세 살 여성분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뒤 헤어질 생각도 했지만, 남편이 그 관계를 끝내고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 하며 진심으로 사과하자 다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남편의 행동은 달라졌지만, 그날 식탁에서 본 잠금화면은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다시 떠올랐습니다.
용서했다고 말한 뒤에도
남편은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고, 약속대로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조금 늦는다는 문자를 보내면 그분은 위치 공유 앱부터 열었습니다. 회사 건물 위에 떠 있는 점을 보고 나서야 한숨 돌렸지만, 삼십 분쯤 지나면 다시 앱을 열었습니다.
“용서한다고 해 놓고 이러는 제가 더 못된 사람 같아요.” 첫 상담에서 그분이 한 말입니다. 친구들은 용서했으면 이제 잊으라고 했고, 본인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남편 외도 극복에 관한 글을 찾아 읽으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에 기대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 장면은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자신을 탓했습니다.
외도가 드러난 뒤 부부가 함께 상담을 받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배우자가 행동으로 믿음을 다시 쌓아 가는 과정은 관계 회복에 필요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불안이 크다면 병원에서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분 부부도 부부상담을 받았고, 남편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답했습니다. 그런데도 진동 소리에 철렁하는 가슴은 그대로였습니다.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필 때는 지금도 배우자에게서 이상한 일이 보이는지,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가슴이 가라앉지 않는지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전자라면 현재의 관계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후자라면 예전에 겪은 충격과 불안이 작은 신호에도 되살아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확인하고도 가라앉지 않는 쪽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했는데도, 왜 가슴은 아직 그날처럼 반응했을까요?
다시 놓은 다리 위에서
심리도식 이론에서는 가까운 사람이 나를 속이거나 상처 줄 것이라는 뿌리 깊은 예상을 ‘불신 도식’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시절 가까운 사람과의 경험에서 이런 예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외도로 실제로 믿음이 깨진 뒤에는 엎어 둔 휴대전화의 진동, 늦어지는 귀가, ‘야근’이라는 한마디만으로도 그날의 장면과 의심이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무너진 다리를 새로 놓았다고 해 보겠습니다. 새 다리가 튼튼해도 무너지는 광경을 본 사람은 그 위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트럭이 지나가며 조금만 흔들려도 난간을 움켜쥐겠지요. 오래전 다른 다리에서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다면 손에 더 힘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휴대전화 진동이 다리를 흔드는 트럭 같았습니다.
“머리로는 이제 괜찮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진동이 울리면 생각할 틈도 없이 가슴이 먼저 떨어져요.” 그럴 때면 위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잠시 안심은 됐지만, 다음에 불안이 올라오면 더 빨리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용서는 마음먹고 내리는 결정이지만, 가슴이 철렁하는 반응은 생각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믿자’고 다짐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자신만 더 탓하게 됩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순간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외도를 알게 된 밤의 충격과 분노를 먼저 다루고, 이어 그분에게 떠오른 오래전 경험과 불신의 감정을 함께 살폈습니다.
욕실 문 앞에서 삼킨 말
첫 상담에서 먼저 다룬 것은 그날 밤 삼킨 말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깰까 봐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물소리가 나는 욕실 문 앞에 휴대전화를 든 채 서 있었다고 합니다. 최면 속에서 그날의 남편을 떠올린 그분은 그때 하지 못한 말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했습니다.
“나만 바보였어. 너무 비참했어.”
말을 마치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뒤로 남편 얼굴을 볼 때마다 치밀던 화는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탁 위 휴대전화가 떨릴 때 가슴부터 내려앉는 반응은 남아 있었습니다. 화는 가라앉았는데 의심은 그대로였습니다.
만화가 끝나고 돌아본 소파
다음 상담은 그 철렁함에서 시작했습니다. 최면 상태가 깊어졌을 때 식탁 위 휴대전화가 떨리던 순간을 떠올리자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또렷해졌습니다. 그 느낌에 머물자 파마약 냄새와 함께 어릴 적 동네의 작은 미용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아직 사탕 껍질을 혼자 까지 못하던 무렵의 여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미용실에 들어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대기 소파에 앉히고 알사탕 껍질을 까서 손에 쥐여 줍니다. “엄마 여기 있을게.” 미용실 이모가 텔레비전에 만화를 틀어 주자 아이는 금세 화면에 빠져듭니다.
만화가 끝나고 돌아보니 소파 옆이 비어 있습니다. 엄마의 장바구니도 보이지 않습니다. 미용실 이모가 말합니다. “엄마 시장 잠깐 가셨어. 금방 오셔.”
그래도 아이는 유리문 앞으로 달려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주먹 쥔 손 안에서 사탕이 녹아 끈적해집니다.
한참 뒤 엄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옵니다. “우리 딸, 잘 있었네. 이제 진짜 여기 있을게.”
엄마는 파마 의자에 앉고, 이모가 엄마 머리에 롤을 말기 시작합니다. 이모가 만화를 다시 틀어 주었지만 아이는 화면을 보지 않습니다. 엄마 의자 옆에 붙어 서서 핸드백 끈을 꼭 쥔 채 거울 속 엄마 얼굴만 올려다봅니다.
엄마가 왜 말없이 나갔는지, 시장에서 무엇을 사 왔는지는 그 장면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최면 속에서 그분은 거울 앞에 선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이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안 보여서 무서웠지. 여기 있겠다던 엄마가 말없이 가 버렸으니까. 말없이 간 건 엄마가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네가 만화를 봐서 엄마가 사라진 게 아니야. 엄마는 장을 보고 이렇게 돌아왔어.”
그 말을 전한 뒤 그분은 만화 주제가가 막 흘러나오던 순간으로 돌아가 그날 오후를 다시 경험했습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말없이 나갔고, 아이는 유리문 앞에서 울었습니다. 엄마가 돌아와 파마 의자에 앉자 아이는 다시 핸드백 끈을 잡고 섰습니다. 다만 끈을 쥔 손에는 전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거울 속 엄마가 고개를 돌려도 가슴이 쿵 내려앉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담 내내 오른손 엄지로 왼손 손톱 끝을 문지르던 그분의 손도, 이 장면을 지나며 조용히 멈췄습니다.
남편의 외도는 실제로 겪은 배신이었습니다. 그날의 충격과 분노는 그것대로 다뤄야 했습니다. 미용실에서 엄마를 믿고 만화를 보다가 엄마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을 때도, 아이는 엄마가 돌아온 뒤까지 핸드백 끈을 잡고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믿었다가 배신을 겪은 뒤 위치를 거듭 확인하던 모습과 맞닿는 대목이었습니다. 믿는 순간 다시 혼자 남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얽힌 다른 경험들도 최면 중 이어서 다루고,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을 살필 수 있다는 이해로 소화해 나갔습니다.
엎어 둔 휴대전화가 다시 떨려도
상담을 모두 마치고 맞은 어느 저녁, 식탁 위 남편의 휴대전화가 또 부르르 떨렸다고 합니다. 그분은 딸아이 담임 선생님이 한 이야기를 이어 가며 아이 밥 위에 생선살을 발라 올려 주었습니다. 남편이 화면을 보고 휴대전화를 다시 엎어 놓을 때까지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은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야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잠금화면 장면이 아예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 밤에는 그 장면이 한 번 스쳐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슴은 내려앉지 않았고, 그대로 드라마를 끝까지 보았다고 합니다.
지난봄에는 친구들과 일박 이일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외도 사실이 드러난 뒤 처음으로 남편과 떨어져 보내는 밤이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위치 공유 앱은 한 번도 열지 않았고, 돌아와서 그 앱을 지우자고 먼저 말한 것도 그분이었습니다.
그 밤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기억이 떠오를 때 몸이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배우자를 용서하고 다시 살기로 했는데도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그 밤의 잠금화면이 떠오른다면, 용서가 부족하다고 자신을 탓하기 전에 무엇이 불안을 되살리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실제 외도의 충격과 함께, 믿고 있다가 상대가 말없이 사라질까 봐 거듭 확인하던 오래전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상담 뒤에는 그 기억이 스쳐도 식탁에서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