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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소파에 기대어 쉬는데 오른쪽 가슴이 찌릿, 하고 결립니다. 무거운 것을 든 적도, 부딪힌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 그날 밤, 결국 검색창에 ‘오른쪽 가슴 통증’을 쳐 봅니다. 화면 가득 폐렴, 폐암 초기 증상 같은 말들이 쏟아지고, 그렇게 새벽까지 휴대폰을 쥔 채 잠들지 못합니다.
얼마 뒤 호흡기내과에서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그래도 못 미더워 CT까지 찍었다고 합니다. 모두 깨끗했습니다. “폐도 깨끗하고 심장도 괜찮대요. 그런데 왜 쉴 때도 계속 결리고 아픈 거죠? 검사로는 안 잡히는 큰 병이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십 대 초반의 한 분이 안고 온 걱정입니다.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던 길에도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그럼 이 통증은 뭐지’ 하는 불안만 더 자랐다고 했습니다.
검사가 깨끗해도 가라앉지 않는 오른쪽 가슴 통증
순서부터 말씀드리면, 오른쪽 가슴 통증은 심장보다 근육과 갈비뼈 주변, 폐, 위장 쪽 원인이 흔해서 병원 검사로 먼저 가려내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검사를 거듭해도 이상이 없는데 통증이 계속되고,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긴장하는 시기에 유독 심해지며, 숨이 얕아지고 어지러움까지 따라온다면 — 몸이 아니라 불안이 만드는 통증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불안이 만든 긴장과 예민해진 편도체
주먹을 한 시간만 힘껏 쥐고 있어 보십시오. 아무 데도 부딪히지 않아도 손이 저리고 아파 옵니다. 불안한 사람의 가슴이 꼭 그렇습니다. 마음이 경계 태세에 들어가면 어깨가 굳고 가슴 근육이 안으로 움츠러들며, 호흡은 얕아집니다. 그 긴장이 며칠, 몇 주 이어지면 맞은 데 없이도 가슴이 결리고 뻐근하고 찌릿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통증을 키우는 장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몸에서 올라오는 신호를 받아 ‘위험’과 ‘괜찮음’으로 분류하는 뇌 속 검열관, ‘편도체’입니다. 편도체가 예민해져 있으면 작은 결림 하나도 ‘큰 병의 신호’로 받아들여져 공포가 켜집니다. 공포는 근육을 더 움켜쥐게 하고, 더 움켜쥔 근육은 더 아파 옵니다. 통증이 공포를 부르고 공포가 통증을 키우는, 출구 없는 맞물림입니다.
이 분류 작업은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의식이 닿지 않는 무의식의 깊이에서, 묻지도 않고 순식간에 끝나 버립니다. 깨끗한 검사 결과지를 백 번 들여다봐도 안심이 오래가지 않는 까닭입니다. 결과지를 읽는 것은 의식이고, 위험 도장을 찍는 것은 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약으로도 풀리지 않는 불안의 손
그분도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를 먹어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고 합니다. 통증과 불안을 가라앉히는 약이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가슴을 안에서 움켜쥐고 있는 그 손, 불안의 까닭까지 풀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물어야 할 것은 통증의 위치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 내 편도체는 왜 유독 몸의 신호에 이토록 예민해졌을까. 최면상담은 그 답이 새겨져 있는 무의식으로 내려가, 처음 그렇게 자리 잡은 순간을 찾는 작업입니다.
최면 속에서 찾아간 세 살의 안방
그분과도 깊은 최면 속에서 그 순간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통증이 올 때마다 함께 올라오던 느낌, ‘내 몸속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다’는 그 서늘한 불안을 따라가자, 떠오른 것은 병원이 아니라 세 살 무렵의 어두운 안방이었습니다.
한밤중, 잠결의 아이 가슴에 누군가 가만히 귀를 대고 있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아이가 기침이라도 한 번 하면 집 안의 불이 다 켜지고, 이마를 짚는 손과 들썩이는 한숨,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밤마다 이어졌습니다. 아이는 아픈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늘 아이의 몸 어딘가가 잘못될까 마음을 졸였고, 그 조바심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스몄습니다.
어머니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까지는, 최면 속 장면이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이에게 새겨진 것은 또렷했습니다. ‘내 몸속에는, 어른들을 저렇게 두렵게 만드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아이의 편도체는 제 몸의 신호를 남들보다 몇 배 크게 듣는 검열관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슴이 한 번 결렸을 뿐인데 폐와 암부터 떠오른 것은, 그 믿음이 수십 년째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통증에 큰 병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폐가 아니라, 아주 어린 날 몸에 스며든 오래된 불안인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은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니, 통증과 불안 사이의 연결은 짚으려야 짚을 수가 없습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그 어두운 안방의 아이 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걱정은 어머니의 마음이지 네 몸의 일이 아니라고, 네 몸은 그때도 지금도 고장 나 있지 않다고, 너는 이렇게 건강한 어른이 되었다고요. 아이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어른들의 두려움을, 그렇게 한 겹씩 떼어 냈습니다.
몇 주 뒤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며칠 전 기지개를 켜다 오른쪽 가슴이 살짝 결렸는데, ‘어제 대청소를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는 그냥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결림이 한 달 전에는 폐암 검색으로 새벽까지 이어지던 신호였습니다. 통증보다 먼저, 통증을 읽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검사가 깨끗한데도 가슴이 자꾸 아프다면, 그 통증은 꾀병도 엄살도 아닙니다. 불안이 근육을 움켜쥐어 만들어 낸, 분명히 실재하는 통증입니다. 다만 그 출처가 폐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일 뿐입니다. 그러니 정상이라는 결과를 받고도 더 정밀한 검사만 찾아 헤매고 계셨다면, 이제 그 불안이 언제 새겨졌는지도 함께 들여다볼 만합니다. 그 자리를 찾아 풀면, 오래 끌어온 통증도 보통 한 달 내외에 차츰 누그러지곤 합니다.
오늘 밤에도 통증이 올 때마다 검색창부터 열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화면 속 무서운 병명들은 그 통증의 답이 아닙니다. 답은 검색창이 아니라, 가슴을 안에서 움켜쥐고 있는 오래된 불안 쪽에 있습니다. 그 불안에도 처음이 있고, 처음이 있는 것은 풀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