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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님. 다음엔 제가 더 신경 쓸게요.”
추석 당일 점심, 시댁 식탁에서 서른여섯 살 여성분이 시어머니에게 웃으며 한 대답입니다. 시어머니는 일곱 살 손자의 팔을 쥐어 보더니 “애가 왜 이렇게 말랐니, 집에서 뭘 먹이는 거야?” 하셨습니다. 그분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볼은 뻣뻣하게 굳었고, 목 안이 따끔거려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행주를 너무 세게 쥐어서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고 합니다.
시어머니 앞에서 삼킨 말은 두 시간 뒤 고속도로 위 차 안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아까 어머님이 그러실 때 당신도 옆에 있었잖아. 왜 한마디도 안 해?”
남편이 앞만 보며 “엄마가 원래 말을 그렇게 하시잖아. 그냥 흘려들어” 하자, 목 뒤가 확 뜨거워지고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고, 뒷좌석에서 자던 아들이 놀라 깨서 울었습니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의 말꼬리를 붙잡고 싸웠습니다.
초등학교 돌봄교실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그분은 첫 상담에서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어머님 말씀은 이제 그러려니 해요. 그런데 남편이 ‘흘려들어’ 하는 순간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요. 아이 앞에서 소리 지른 게 제일 후회되고요. 시댁 얘기만 나오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결혼한 지 여덟 해. 고부갈등은 신혼 때부터 있었지만, 요즘 그분을 더 괴롭힌 것은 시어머니와의 일보다 남편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시댁에서 삼킨 말은 남편의 ‘흘려들어’라는 한마디 앞에서 번번이 큰 화로 터졌습니다.
상담 중 그 화와 함께 떠오른 것은 시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를 따라 놀러 간 이모할머니 댁 안방에서,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있던 어린 자신이었습니다.
시댁에서는 웃고, 돌아오는 차에서는 터진다면
시댁 이야기로 부부싸움이 잦다면 시어머니 앞에서와 남편 앞에서 자신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볼 만합니다. 시댁에서는 서운한 말을 듣고도 웃으며 “네”라고 답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는 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합니다. 시어머니의 말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는데도 내 편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화가 더 치밀 수 있습니다.
그분도 그랬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며칠 지나면 흐려졌지만, 남편이 “흘려들어”라고 하던 목소리는 몇 달이 지나도 또렷했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시댁에 가는 날보다 돌아오는 차 안이 더 두려웠다고 합니다.
멍든 팔은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
배우자의 한마디가 유독 아프게 들릴 때는 ‘심리도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심리도식은 이전의 경험과 맞물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믿음입니다. ‘싫다고 말해도 내 편은 없다’는 생각이 익숙하다면, 배우자의 “그냥 넘겨”라는 말에 다시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따져 보기 전에 몸과 감정이 먼저 반응하기도 합니다.
멍든 팔을 떠올려 보세요. 누군가 살짝 스쳐도 아프고, 스친 사람은 왜 그렇게 아파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 손길을 살피는 것과 함께, 이미 아픈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응이 조금 더 이해됩니다.
남편의 “흘려들어”는 그 자체로도 서운할 만한 말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그 한마디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가 듣지 못했던 대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시댁 가는 횟수를 줄여도 남아 있던 화
부부도 할 수 있는 일은 해 보았습니다. 명절에는 하룻밤만 자고 오기로 정했고, 시댁과의 연락은 남편이 맡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엄마가 선을 넘으면 내가 말할게”라고 약속했고, 실제로 한 번은 시어머니에게 “엄마, 그만하세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방문 횟수와 연락 창구를 부부가 함께 정하고 남편이 중간에서 조율하는 일은 고부갈등 스트레스를 덜어 주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약속 덕분에 시댁에 머무는 시간은 줄었지만, 남편과의 싸움은 줄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전화로 “애 감기 안 걸리게 옷은 잘 입히지?” 하고 물은 날도 그랬습니다. 통화 이야기를 들은 남편이 “엄마는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야” 하자, 그분의 목소리부터 높아졌습니다.
누가 옳은지 따지는 대화도 여러 번 했고, 남편이 “그건 엄마가 잘못했네”라고 인정해 준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음번 “그냥 넘겨” 한마디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차에 타기 전마다 오늘은 화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다짐보다 화가 먼저 치밀었습니다. 남편의 말이 왜 그렇게 아픈지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상담에서는 그때의 감정과 몸의 반응을 따라가며 비슷한 서운함을 느낀 어린 시절의 경험을 살폈습니다.
앞머리를 들추던 이모할아버지
깊은 최면에 들어간 그분은 억지로 웃을 때처럼 굳는 볼과 따끔한 목 안의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떠오른 곳은 외가 쪽 이모할머니 댁 안방이었습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돌던 무렵의 여자아이가 상 앞 방석에 앉아 있습니다. 이모할아버지는 옆에 있고, 엄마는 부엌에서 이모할머니와 배를 깎고 있습니다.
이모할아버지가 아이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들추며 “누가 이렇게 삐뚤빼뚤 잘랐어? 꼭 밤송이 같네” 하고 웃습니다. 둘러앉은 어른들도 따라 웃습니다. 아이가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 이모할아버지는 그 손을 떼어 내고 또 앞머리를 들춥니다. 그러기를 몇 번, 아이의 볼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아이는 방석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엄마 소매를 잡아당깁니다. “엄마, 할아버지가 자꾸 놀려. 싫어.”
엄마는 안방 쪽을 한 번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춥니다. “어른한테 싫다고 하는 거 아니야. 가서 웃고 있어.” 아이는 안방으로 돌아가 아까 그 방석에 다시 앉습니다.
이모할아버지가 또 앞머리를 들춥니다. 아이는 이번에는 이마를 가리지 않습니다. 엄마 말대로 웃어 보려고 입꼬리를 올리지만 볼은 뻣뻣하게 굳고, 목 안은 무언가를 삼킨 듯 따끔거립니다. 무릎 위에서는 치맛단을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부엌에서 안방으로 돌아가는 아이와 나란히 걸었습니다. 다시 방석에 앉기 전,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싫다고 말한 거 잘했어. 머리를 자꾸 들추면 누구라도 싫어. 엄마가 네 편을 못 들어 준 건 네 마음이 틀려서가 아니야. 지금은 내가 네 편이야.”
그 말을 들은 뒤 같은 오후를 처음부터 다시 경험했습니다. 이모할아버지는 이번에도 앞머리를 들췄고, 엄마의 대답도 같았습니다. 아이는 방석으로 돌아가 이마를 가리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여전히 싫었지만, 싫다고 말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목 안의 따끔함이 가라앉고 치맛단을 쥔 손도 풀렸다고 합니다.
눈을 뜬 그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때 정말 싫었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첫 상담부터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줄곧 웃는 얼굴이었던 분입니다.
아이는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엄마를 찾아갔지만 “가서 웃고 있어”라는 말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시어머니 앞에서 웃으며 “네”라고 답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남편에게 서운함을 말했을 때 돌아온 “흘려들어”는, 아이였을 때 엄마에게 마음을 알아달라고 했다가 듣지 못했던 대답과 닮아 있었습니다. 마음을 꺼냈다가 다시 삼키거나 큰소리로 터뜨리게 했던 다른 경험들도 최면 중 이어서 다루며, 서운함을 느끼고 필요한 말을 전하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는 이해로 소화해 나갔습니다.
아들이 깨지 않은 귀갓길
상담을 마친 뒤 시아버지 생신 모임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번에도 손자를 보며 “아직도 비쩍 말랐네” 하셨습니다. 목 안이 잠깐 따끔했지만, 그분은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평소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님, 저도 밥 챙기는 데 신경 많이 써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서운해요.” 시어머니는 대답 없이 국을 뜨셨고, 그분도 굳이 분위기를 풀려고 애쓰지 않고 식사를 이어 갔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말을 꺼냈습니다. “엄마 원래 그러시는 거 알잖아. 그냥 흘려듣지 그랬어.” 목 뒤가 조금 뜨거워졌지만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흘려듣기엔 서운했어. 엄마 편 들지 말라는 게 아니야. 내가 서운하다고 하면 ‘그랬구나’ 한마디만 해 줘.” 남편은 한참 운전만 하다가 “그랬구나” 하고 작게 따라 말했다고 합니다.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먹다 잠든 아들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습니다.
명절 뒤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 화가 가장 크게 치미나요? 시어머니의 말보다 남편의 “그냥 넘겨”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면, 시댁과의 거리뿐 아니라 그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서운한지도 살펴볼 만합니다. 이 사례의 여성은 그 순간 목소리가 커지는 반응을 상담에서 다뤘고, 이후 남편에게 서운함을 차분히 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