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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남자친구한테 사과한 걸 세어 봤더니 열 번이 넘더라고요. 그런데 뭐가 미안했는지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에요. 나머지는 그냥 그 사람 얼굴이 굳어서 했어요. 사과하고 나면 명치에 뭐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서, 사과한 날 밤에는 대화를 몇 번이고 되감느라 잠을 못 자요.”
첫 상담 날, 그분은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이 말을 꺼냈습니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그리는 서른 살 여성으로, 남자친구와는 3년째 만나고 있었습니다. 약속이나 들은 말을 두고 기억이 어긋날 때마다 대화는 늘 그분의 사과로 끝났습니다.
상담을 신청하기 며칠 전에도 그랬습니다. 친구 결혼식에 함께 가기로 했는데, 전날 밤 남자친구가 “내가 언제 간다고 했어? 너 요즘 없는 말을 자꾸 지어내더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목이 조여 오고 머리가 멍해졌다고 합니다. 메시지를 찾는 동안에는 손가락이 떨려 화면이 자꾸 엉뚱한 데로 넘어갔습니다. 겨우 찾은 대화창에 ‘그래, 같이 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도, 그분 입에서는 “미안, 내가 착각했나 봐”가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달랐습니다. 도면에 적는 치수는 한 번 재고 나면 믿었고, 현장에서 다른 말이 나와도 근거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 앞에서는 적혀 있는 메시지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상담실에서도 그분은 이야기를 하나 마칠 때마다 “제가 이상한 거죠?” 하고 묻고는 마주 앉은 상담사의 표정부터 살폈습니다.
그분은 한동안 밤마다 연인 가스라이팅을 다룬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자기 이야기 같다가도, 글을 덮으면 다시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계를 이해하려는 동안에도 자기 느낌을 믿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메시지가 눈앞에 있는데도 왜 사과가 먼저 나올까요? 그분은 자기 기억보다 남자친구의 굳은 표정을 먼저 믿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미안했는지 말할 수 있나요
그분처럼 기억이 엇갈릴 때마다 사과로 대화를 끝낸다면, 최근의 사과를 하나씩 떠올려 보세요. 무엇이 미안했는지 말할 수 있나요? 분명 잘못한 일도 있겠지만,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데도 그 순간의 긴장을 끝내려고 사과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관계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언제 내 기억을 접고 먼저 사과하는지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내 기억보다 상대의 표정을 먼저 믿게 될 때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기억과 느낌을 거듭 부정하거나 바꿔 말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종을 가리킵니다. 병명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도 남자친구에게 진단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런 말을 들을 때 그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자기가 느끼고 겪은 일을 거듭 부정당하면 ‘내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커질 수 있습니다. 다툼을 피하려고 상대의 설명부터 받아들이는 일도 잦아집니다. 그분은 기록을 확인하기도 전에 남자친구의 표정부터 살폈습니다.
정답지를 다른 사람이 쥔 시험을 떠올려 보세요. 무엇을 적었는지 분명히 알아도, 그 사람이 고개를 저으면 내 답을 의심하게 됩니다. 남자친구가 얼굴을 찌푸릴 때 그분도 눈앞의 메시지보다 그의 표정을 먼저 믿었습니다.
캡처 화면이 수십 장 쌓여도
주변에서는 대화를 캡처해 두고, 믿을 만한 친구에게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기록을 남기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흔들리는 판단을 붙드는 데 힘이 됩니다. 상대가 겁을 주거나 위협한다면, 마음을 살피기에 앞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주변에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분의 휴대전화에도 캡처한 화면이 수십 장 쌓였습니다. 그런데 기록이 있어도 사과가 먼저 나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친구가 “내가 언제?” 하며 눈썹을 찌푸리면, 화면을 열어 보기도 전에 목부터 조여 왔습니다.
초겨울 버스 정류장의 아이
깊은 최면에 든 뒤, 그분은 남자친구의 “내가 언제?”라는 말을 들을 때 목이 조이던 느낌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얼마 뒤 두 팔로 자기 몸을 감싸며 말했습니다. “추워요. 바람이 너무 차요.”
‘추워’, ‘배고파’ 같은 말을 막 하기 시작한 무렵, 초겨울 오후의 버스 정류장입니다.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선 아이는 바람이 불 때마다 볼이 따갑고, 손가락 끝이 빨개집니다. 아이의 도톰한 점퍼는 엄마 팔에 걸려 있습니다.
“엄마, 추워.” 엄마는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며 대답합니다. “안 추워. 이 정도가 뭐가 추워.”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봅니다. 엄마는 추운 기색이 없습니다. 아이는 빨개진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엄마를 봅니다. 목이 조여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입니다. 두 손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고, 입술이 떨려도 춥다는 말은 다시 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도 비슷했습니다. 밥을 먹고 얼마 안 돼 “배고파” 하면 “금방 먹었는데 무슨 배가 고파”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아이는 춥거나 배가 고파도, 말하기 전에 엄마의 얼굴부터 올려다보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왜 점퍼를 입혀 주지 않았는지는 그분도 알지 못했습니다. 상담에서는 엄마의 사정을 짐작하기보다, 시린 손을 소매에 감추고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에게 주목했습니다.
최면 속 정류장에서 그분은 아이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은 바람을 맞다가, 소매 속 손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빨개진 손가락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손가락이 이렇게 빨개졌네. 네가 춥다고 한 거 맞아. 엄마는 안 추울 수도 있고, 너는 추울 수도 있어. 네 몸이 추운 건 네가 제일 잘 알아.”
잠시 뒤 그분은 엄마 옆에 선 어린 자신이 되어 그날 오후를 다시 겪었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찼고, 엄마는 이번에도 “안 추워” 하며 점퍼를 팔에 건 채 버스 쪽을 바라봤습니다. 아이도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두 손을 소매에 넣었습니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아이 마음에 짧은 생각 하나가 지나갔습니다. ‘엄마는 안 춥구나. 나는 추운데.’ 손끝은 여전히 시렸지만 이번에는 목이 꽉 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눈을 뜬 뒤 상담을 마칠 때까지, 그분은 “제가 이상한 거죠?”라고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날 아이는 추위를 느끼면서도 엄마의 얼굴을 보고 춥다는 말을 거둬들였습니다. 남자친구가 자신의 기억을 부정할 때도 그분은 메시지보다 상대의 굳은 얼굴을 먼저 보고 사과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자신의 감각이나 기억을 말하기 전에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물러났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정답처럼 받아들여 자기 판단을 접었던 다른 경험들도 최면 중 이어서 살피며, 자신의 감각과 기억을 확인해도 된다는 이해를 넓혀 갔습니다.
메시지를 찾아보지 않은 저녁
그 뒤로 주말에 그분의 부모님 댁에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을 두고, 남자친구가 또 “내가 언제 그랬어?” 한 날이 있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했지만 목까지 조이지는 않았고, 휴대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찾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들었어. 내가 지어낸다고 말하는 건 그만해 줘.” 그 말 끝에 “미안”을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을 따로 먹었습니다. 그래도 그 밤에는 대화를 되감느라 잠을 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주에 한 사과를 다시 세어 보니, 무엇이 미안했는지 말하지 못하는 사과는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남자친구와 계속 만날지는 아직 고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답을 남자친구의 표정에서 찾지는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기억이 엇갈릴 때마다 ‘내가 이상한 걸까’ 하며 잠을 설친다면, 사과하기 직전 무엇이 일어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기록을 확인하기도 전에 굳은 얼굴을 보고 자기 기억을 접었습니다. 상담 뒤에는 같은 말을 듣고도 “나는 그렇게 들었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