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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면 예전의 저로 돌아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누가 옆에서 한숨만 쉬어도 ‘또 나 때문인가’ 싶어서 몸부터 쪼그라들어요.”
상담실 의자 끝에 걸터앉은 그분은 가방을 무릎 위에 꼭 안고 있었습니다. 가구 회사에서 주문 관리를 맡은 서른아홉 살 여성입니다. 다섯 해를 만난 연인과 헤어진 지 여덟 달이 지났지만, 누군가 언짢아하는 기색만 보여도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전 연인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했고, 그분도 밤마다 관련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한 뒤에도 몸에 남은 반응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한 고객이 배송된 식탁의 색이 주문과 다르다며 전화로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분은 주문서를 확인하기도 전에 “제가 잘못 넣었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이 굽었으며 목소리도 작아져, 고객이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주문은 맞았습니다. 공장에서 다른 색 식탁을 내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날 밤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합니다.
전 연인은 모임에서 늘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둘만 있을 때 기분이 상하면, 이유는 언제나 그분 쪽에서 찾았습니다. “네가 그 얘기를 꺼내서 저녁을 다 망쳤잖아.” 자기 실수가 나중에 드러나도 사과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그분이 이야기를 꺼내면 “넌 좀 가만있어” 하고 말을 자르기 일쑤여서, 그분은 점점 모임에서 입을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라는 말은 흔히 쓰지만, 전 연인에게 실제로 어떤 성격 문제가 있었는지는 직접 평가하지 않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이 겪은 일과 헤어진 뒤에도 이어진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최면 중 떠오른 첫 장면에는 전 연인이 아닌, 안방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 앞에서도
전 연인이 떠오를 때 괴로운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답답해한 것은 팀장의 한숨, 고객의 높아진 목소리, 친구의 굳은 표정 앞에서도 몸이 작아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두 헤어진 연인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어진 연인을 떠올릴 때 마음이 괴로운 것과, 상관없는 사람의 한숨에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조금 다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팀장이나 고객 앞에서도 자기 잘못부터 찾았습니다. 관계가 끝난 뒤에도 비슷한 반응이 이어지는지, 어떤 순간에 시작되는지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용의자 명단 맨 윗줄에 적히는 이름
가까운 사람의 표정이나 기분을 살피다가 관계가 어긋나면 자기 잘못부터 찾는 방식은 불안형 애착의 특징과 닮아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어린 시절부터의 관계 경험과 관련될 수 있지만, 한 장면만으로 애착 유형이나 원인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례에서 눈여겨볼 점은 상대가 누구든 언짢은 기색을 보이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자신부터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일이 틀어질 때마다 누가 잘못했는지 적는 명단이 있다고 해 볼까요. 보통은 사실을 확인한 뒤 이름을 적습니다. 그분의 명단에는 주문서를 보기도 전에 자기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갔습니다. 헤어진 뒤에도 그 순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화가 났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헤어진 뒤 그분은 연락 통로를 모두 끊었습니다. 관련 글을 읽으며 겪은 일을 이해하려 했고, 친구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상대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누군가 한숨을 쉬면 여전히 자신을 탓했습니다.
“친구들한테 그 사람 얘기를 할 때는 저도 화가 나요. 그런데 다음 날 팀장님이 한숨 한 번 쉬면 다시 작아져요. 화가 났던 저는 어디로 갔나 싶어요.”
친구들의 말은 위로가 됐습니다. 하지만 팀장의 한숨을 들으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등이 굽었습니다. 이렇게 판단보다 먼저 일어나는 반응을 상담에서는 무의식 자동반응으로 살펴봤습니다.
상담에서는 한숨을 들을 때 등이 굽고 턱이 당겨지는 바로 그 순간의 몸 느낌에 주목했습니다. 깊이 집중한 상태에서 그 느낌을 따라가자,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서랍 소리가 나던 아침
깊은 최면 상태에 들어간 그분에게 팀장이 한숨을 쉬던 오후를 떠올려 보게 했습니다. 등이 조금씩 굽고 턱이 가슴 쪽으로 당겨지더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서랍 여닫는 소리가 나요. 아빠가 뭘 찾고 있어요.”
장난감 바구니가 아이 허리께까지 오던 무렵의 어느 아침입니다. 출근 시간이 다 된 아버지가 안방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열쇠 꾸러미를 찾습니다. 거실에서 소꿉 그릇을 늘어놓고 놀던 아이에게 아버지가 돌아서서 묻습니다. “열쇠 어디 뒀어? 네가 또 만졌지?”
아이는 열쇠를 만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네가 또 만졌지?”라고 묻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이 움츠러듭니다. 아이는 혹시 자기가 옮겼을까 봐 장난감 바구니를 쏟아 블록과 인형 사이를 뒤집니다. 그사이 아버지는 벽에 걸린 점퍼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고, 아이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나갑니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아이는 쏟아진 장난감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열쇠가 나왔는데도 달아오른 얼굴은 쉽게 식지 않습니다.
그분은 장난감 사이에 앉은 어린 자신 곁으로 가서 벽에 걸린 점퍼를 함께 바라봤습니다. 열쇠가 처음부터 그 주머니에 있었다고 알려 주고, 아버지가 대답을 기다려 주지 않았던 질문을 다시 물었습니다. “열쇠, 만졌어?”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지. 너는 안 만졌어. 열쇠는 아빠 점퍼에 있었어. 아빠가 미안하다는 말 없이 나갔어도, 네 잘못은 아니야.”
그런 다음 그분은 그 아침을 한 번 더 겪었습니다. 서랍 여닫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아버지가 돌아서서 “네가 또 만졌지?” 하고 묻습니다. 아이는 바구니를 쏟아 블록 사이를 뒤지고, 아버지는 점퍼에서 열쇠를 꺼내 말없이 나갑니다.
이번에는 아이가 그 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바구니를 뒤지는 손은 바빴지만 얼굴은 달아오르지 않았습니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는 ‘나 아니었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웅크린 등도 금세 펴졌다고 합니다.
최면을 마치고 눈을 뜬 그분은 “아빠 얼굴은 흐릿한데, 서랍 소리는 또렷해요” 하며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날 상담을 마칠 무렵 그분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무릎 위에 꼭 안고 있던 가방은 어느새 옆 의자에 내려놓은 뒤였습니다.
그 아침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잘못일까 봐 장난감을 뒤졌습니다. 열쇠가 아버지의 점퍼에서 나왔는데도 아무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웅크리고 남았습니다. 그분은 전 연인에게 “너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다른 사람의 한숨을 들을 때도 사실부터 확인하기보다 자기 잘못을 먼저 찾았습니다. 상담에서는 이 닮은 반응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최면 중에는 누군가 언짢아하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자기 잘못부터 찾고 몸을 움츠렸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현재의 자신은 상대의 기분과 잘못의 책임을 구분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한 뒤 필요한 만큼만 책임져도 된다는 이해로 그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주문서부터 연 오후
어느 오후에는 한 고객이 소파 천의 색이 주문과 다르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분은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지만 “주문서부터 확인하고 바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작아지지 않아 고객이 되묻지도 않았습니다. 주문서를 열어 보니 신입 직원이 색상 번호의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이럴 때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신입 직원의 실수까지 떠안았습니다. 이번에는 신입 직원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입력 화면을 함께 보았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신입 직원에게 “색상 번호는 입력하고 나서 한 번 더 소리 내서 읽어 봐요” 하고 알려 준 뒤, 고객에게 보낼 안내 문자를 같이 썼다고 합니다. 그날 오후 팀장이 모니터를 보며 한숨을 쉬었을 때는 고개를 들어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주 팀 회의에서는 색상 번호를 입력한 뒤 소리 내어 한 번 더 읽자는 방법을 직접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안건을 설명하는 동안 말끝을 흐리지도,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요” 같은 말을 앞에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준비한 말은 처음과 같은 목소리로 끝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헤어진 뒤 고객의 항의 앞에서 사과보다 주문서를 먼저 연 것은 그분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전 연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과 더불어, 누군가 언짢아할 때 자기 잘못부터 찾는 반응도 살펴본 결과였습니다. 이제는 한숨 소리만으로 책임을 떠안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게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