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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본 게 없어요. 반신욕에 백색소음에, 좋다는 영양제까지 챙기고 휴대폰은 거실에 두고 눕거든요.
그런데 불을 끄는 순간부터 머리가 맑아져요. 오늘은 꼭 자야 한다고 다잡을수록 잠은 더 멀어지고요.
아침이면 모래를 끼얹은 듯 눈이 뻑뻑하고 몸은 천근인데, 밤만 되면 그 몸이 기어이 깨어나요.
저는 대체 뭘 더 해야 하나요?”
사무 일을 하시는 마흔 중반의 여성분이 상담실 의자에 앉자마자 쏟아내신 말씀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 글은 잠 잘 오는 법을 한 가지 더 보태려는 것이 아닙니다. 좋다는 방법을 다 해봤는데도 밤이 길었던 이유, 그리고 그 밤이 풀리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려드리는 글입니다.
그분의 침대 머리맡 서랍은 작은 약국 같았다고 합니다. 수면 영양제와 라벤더 오일, 안대와 귀마개까지, 잠 잘 자는 법을 검색해 좋다는 것이 보이면 일단 사 두셨습니다. 처음 며칠은 듣는 듯하다가 이내 도로 길어지는 밤이 되풀이되었고, 그럴수록 잠자리에 드는 일은 점점 시험처럼 되어 갔다고 하셨습니다.
애쓸 때만 잠이 달아나는 사람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상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는 깜빡 졸기도 하고, 여행지의 낯선 침대에서는 오히려 쉽게 잠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잠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자려고 하는 순간’에만 잠이 달아나는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왜 하필 애쓰는 순간일까요.
침대가 긴장의 스위치가 될 때
심리학에서는 이런 일을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어떤 자리와 어떤 반응이 거듭 짝지어지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몸이 그 반응을 자동으로 불러내는 학습을 말합니다. 잠 못 드는 밤이 쌓인 분에게는 침대와 취침 시각이 어느새 잠이 아니라 긴장과 짝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눕는 행동 자체가 긴장의 신호가 되고, 자야 한다는 다짐은 그 긴장을 한 번 더 끌어올립니다.
집의 배선이 뒤바뀐 것과 같습니다. 침실 스위치를 눌렀는데 엉뚱하게 마당의 불이 켜지는 집처럼, ‘잘 시간’이라는 스위치를 누르면 쉼이 켜져야 할 자리에 경계가 켜지는 것입니다. 이런 집에서는 전구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갈아 끼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분의 서랍을 채우던 물건들이 바로 그 전구였습니다.
그 방법들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빛과 소음을 줄이는 일은 분명 몸의 긴장을 누그러뜨려 줍니다.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도 마찬가지여서, 예민해진 각성을 가라앉혀 잠드는 문턱을 낮춰 줍니다. 다만 어느 쪽도 벽 안에서 뒤바뀐 배선, 그러니까 잠자리와 긴장을 묶어 놓은 연결 자체를 풀어 주지는 못합니다.
무의식이 기억하는 첫 장면
이 연결을 다루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머리의 결심이 아니라 무의식이 학습해 둔 자동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여기가 안전한 내 침대라는 걸 알아도, 몸은 익힌 대로 경계를 켭니다. 최면상담이 하는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식이 드나들지 못하는 그 무의식의 층에 다가가, 그 짝지음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처음 자리를 찾아 풀어 가는 것입니다.
그분 역시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뒤에야 그 자리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불을 끄고 누울 때마다 가슴께에 서리던 서늘한 조바심이 점점 또렷해지더니, 본인도 영문을 모를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직 말이 트이기 전, 두 돌이 지났을까 싶은 어린 날의 병실이었습니다. 폐렴으로 입원해 있던 아이가 한밤중에 깨어 보니,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던 엄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병원은 밤이 되면 보호자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엄마에게는 집에 두고 온 큰아이도 있었습니다. 철제 난간 너머 낯선 천장과 소독약 냄새 속에서, 아이는 울다 지쳐 잠들고 깨어 다시 우는 밤을 며칠이고 되풀이했습니다.
어른의 달력으로는 며칠이면 끝난 입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로 묻지도 답하지도 못하던 아이의 마음에 남은 기록은 전혀 달랐습니다. 눈을 감고 잠든 사이에 가장 안전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니 놓치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분에게 잠은 쉼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는 문이 되었고, 수십 년 사이 이부자리가 몇 번이고 바뀌어도 벽 안의 배선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한 달 뒤 찾아온 변화
장면이 또렷해진 뒤, 그분은 어른이 된 모습 그대로 그 병실의 아이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난간을 내리고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엄마는 너를 두고 떠난 게 아니라 아침마다 어김없이 돌아왔다는 것, 그 밤들은 모두 끝났고 너를 지켜 줄 어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천천히 일러 주었습니다. 품 안의 아이는 더 버티지 않고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그 순간 상담 의자의 그분도 길게, 아주 길게 하품을 하셨는데, 본인 기억으로 참 오랜만이었다고 합니다.
한 달쯤 지나 전해 주신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밤에는 누워서 내일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는데, 그 기억이 거기서 끊기고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진다는 것, 밤마다 생각을 끝까지 완성해 오던 그분에게는 그것이 사건이었습니다. 머리맡 서랍은 요즘 들어 한 번도 열지 않으셨다는데, 무엇을 더해서가 아니라 더는 더하지 않게 되어서 온 변화였습니다.
잠은 노력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안심할 때 비로소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다는 방법을 다 해봤는데도 밤이 길다면, 그것은 정성이나 의지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노력이 닿지 않는 벽 안쪽에서, 잠자리와 긴장을 묶어 둔 오래된 연결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만 가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소파나 낯선 잠자리에서는 곧잘 졸면서, 정작 내 침대에 자려고 누우면 정신이 깨어나는 편이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그 뒤바뀐 연결이 처음 만들어진 자리를 들여다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에도 검색창에 잠 잘 오는 방법을 쳐 넣으려던 참이라면,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보실 때가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