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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연락처 칸에 그 사람 번호를 끝까지 다 쓰고 나서야 펜이 멈췄어요. 헤어진 지 다섯 달이나 됐는데요.”
첫 상담에서 서른한 살 여성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입주자 카드를 쓰다가 열한 자리 번호를 모두 적고 나서야 누구 번호인지 알아차렸습니다. 그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접수대 모서리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번호를 지우려고 볼펜으로 줄을 긋다가 종이가 찢어졌습니다. 새 카드에 다시 쓰려니 손끝이 저려 펜이 자꾸 미끄러졌습니다. 결국 비상 연락처 칸을 비워 둔 채 돌아왔습니다.
4년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통화 한 번으로 관계가 끝났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동네와 가까운 집에서 지내기가 힘들어 이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한 뒤에도 헤어진 사람을 찾는 습관은 그대로였습니다. 알람을 끄자마자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열어 보았고, 퇴근 버스가 그 사람 회사 앞 정류장을 지날 때면 목을 빼고 창밖을 살폈습니다. 마트에서는 그 사람이 즐겨 먹던 과자 앞에 발이 멈췄습니다. 밤에는 마지막 통화를 되짚다가 잠이 들었고, 새벽 네 시쯤 심장이 쿵쾅거려 눈을 뜨곤 했습니다.
밥은 몇 숟가락 뜨다 말았습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시간이 약이라며 이제 그 사람 생각을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그분도 ‘헤어진 사람 잊는 법’을 검색해 사진첩을 비우고 대화방을 나왔지만, 아침마다 프로필 사진을 여는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헤어진 사람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경우, 자꾸 무언가를 찾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적어 둔 비상 연락처
심리학에서는 가까운 사람과 이어져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애착이라고 부릅니다. 아프거나 속상할 때 믿는 사람을 찾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래 만난 연인은 그렇게 기대는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속 비상 연락처 맨 위에 그 사람의 번호가 적혀 있는 셈입니다.
헤어져도 마음속 연락처는 금세 지워지지 않습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생각할 틈도 없이 예전에 기대던 사람을 찾게 됩니다. 관계가 끊기는 신호에 특히 크게 흔들리는 경향을 불안애착이라고 부릅니다. 이 경향이 강하면 연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소식을 거듭 확인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분도 회사에서 싫은 소리를 들은 날이면 퇴근 버스에서 그 사람에게 보낼 말을 먼저 떠올렸다고 합니다. 이제는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이별 후 우울이 깊어지면서 그런 날도 늘었습니다.
그 사람 생각이 날 때마다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간 적어 보셔도 좋습니다. 유난히 피곤하거나 속상한 날에 떠오른다면, 그리운 마음과 함께 힘들 때 기대던 사람을 찾는 마음도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 해 보고도 그대로였던 아침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이 옅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흔히 권하는 이별 극복 방법도 도움이 됩니다. 잠을 못 이루고 끼니를 거르는 날이 이어진다면 병원 진료로 수면과 기분을 돌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분은 여러 방법을 해 본 뒤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첫 상담에서는 그 사람에게 남은 서운함과 원망을 털어냈습니다. 가슴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프로필 사진을 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통화를 떠올리면 두 팔에 힘이 빠지고 허전한 느낌도 여전했습니다.
헤어진 것을 알면서도 프로필 사진을 여는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기대던 시간이 쌓이며 익숙해진 반응이라 결심만으로 멈추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은 이별보다 훨씬 전에 겪은 상실의 경험도 상담에서 함께 살펴봤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분이 이별을 떠올릴 때 느끼던 두 팔의 허전함을 따라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무엇을 잃었다고 느꼈고 왜 계속 찾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었습니다.
베개 옆이 비어 있던 오후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분은 두 팔이 허전하다는 말부터 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것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했지요. 잠시 뒤 오른손으로 소파 가장자리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낮잠 자고 일어났는데 없어요. 베개 옆에 늘 있었는데.”
낮잠에서 깬 어린 여자아이가 이불 위에 앉아 있습니다. 아직 혼자 양말을 신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밤마다 끌어안고 자던 강아지 인형 보리가 베개 옆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쪽 귀가 닳아 솜이 비치던 인형입니다.
아이는 이불을 들추고 커튼 뒤를 살피고 장난감 바구니까지 뒤집어 봅니다. 숨을 참은 채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부엌에서 엄마의 말이 들립니다. “그거 너무 낡아서 아까 정리하면서 버렸어. 더 예쁜 걸로 새로 사 줄게.”
쓰레기봉투는 이미 밖에 내놓은 뒤입니다. 아이는 그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 채 다음 날 아침에도 바구니를 뒤집니다. 밤이면 비어 있는 베개 옆으로 손을 뻗은 채 잠이 듭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장난감 바구니를 뒤지는 아이 곁에서 안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아이 귀에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보리는 어디 숨은 게 아니야. 엄마가 낡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같이 내보냈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였던 건 그래서야. 그렇게 아끼던 거니까 보고 싶은 게 당연해.”
아이는 다시 빈 베개 옆에서 눈을 뜹니다. 이불과 커튼 뒤와 바구니를 뒤지는 손길도, 새 인형을 사 주겠다는 엄마의 말도 그대로입니다. 이제 아이는 보리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구니 앞에 주저앉아 한참 울면서도 숨을 고르게 쉬고, 두 팔의 허전함도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소파 가장자리를 더듬던 그분의 오른손도 무릎 위에 가만히 놓였습니다.
아이는 보리가 어디 갔는지 몰라 방 안을 계속 뒤졌습니다. 그분도 짧은 통화로 이별을 맞은 뒤,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 아침마다 그 사람의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알아도 마음은 익숙한 대상을 계속 찾았던 것입니다.
최면 중에는 소중한 대상을 잃었을 때 어디 갔는지 몰라 계속 찾고, 힘든 순간이면 이미 떠난 대상을 다시 확인하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어른이 된 자신은 그리운 마음을 억지로 없애지 않으면서도, 사라진 대상을 계속 찾는 대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기대도 된다는 이해로 그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비어 있던 칸을 채운 날
상담을 마친 뒤 관리사무소에서 비상 연락처 칸이 비어 있다는 문자가 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사무소에 내려가 대학 동기의 번호를 적었습니다. 이번에는 손끝이 저리거나 펜이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알람을 끄면 프로필 사진 대신 날씨부터 본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싫은 소리를 들은 날에는 퇴근 버스에서 동기에게 “오늘 좀 속상했어”라고 먼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버스가 그 사람 회사 앞을 지날 때도 창밖을 살피는 대신 동기의 답장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 주말에는 이사 후 처음으로 그 동기를 집에 불렀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만날 때마다 그분이 전 연인 이야기를 하고 동기가 들어 주었는데, 그날은 동기가 회사 일로 속상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분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듣고, 지하철역까지 배웅한 뒤에도 동기가 한 말을 곱씹었다고 합니다.
비상 연락처 칸에 다른 번호를 적었다고 4년의 기억이 지워지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속상한 날 마음이 먼저 누르는 번호였습니다.
헤어진 사람을 자꾸 찾게 되는 마음에는 함께 보낸 시간뿐 아니라 그보다 오래된 상실의 경험도 얽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 경험을 살펴본 뒤 속상한 날 기대는 사람과 하루를 보내는 방식에 변화를 느꼈다고 전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알람을 끄자마자 그 사람의 소식부터 찾으셨다면, 힘든 순간 마음이 누구를 찾고 있는지 잠시 돌아보셔도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