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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가 울면서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데, 머릿속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배만 딱딱하게 뭉치고 혀가 뻣뻣하게 굳었어요. 한참 만에 겨우 한 말이 ‘속이 좀 안 좋아’였어요. 여자친구는 그 말을 듣고 가방을 챙겨 나갔어요.”
손해보험사에서 자동차 사고 보상을 맡는 서른일곱 살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여자친구와 신혼집 문제로 다툰 밤이었습니다. 여자친구가 그동안 서운했던 일을 꺼내며 우는 동안, 그분은 식탁 의자에 앉아 배만 둥글게 문질렀습니다.
여자친구는 현관을 나서기 전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점심을 거르고 소화제를 먹었지만, 퇴근할 때까지 배 속이 꽉 막힌 듯했다고 합니다.
며칠 뒤 여자친구가 “혹시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말 들어 봤어?”라고 물었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날 밤 ‘감정 표현 못하는 사람’을 검색하다가, 감정을 말로 옮기지 못해 힘들어한다는 설명을 읽었습니다. 자기 이야기 같아 휴대폰을 내려놓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친구 결혼식에서 신부가 아버지 손을 잡고 들어설 때 하객 여럿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중에 그때 기분이 어땠냐는 질문에 그분은 “배고팠어.”라고 답해 웃음을 샀습니다. 여자친구가 하루에 한 번 기분을 한 단어로 말해 달라고 했을 때도, 대답은 날마다 ‘피곤해’ 아니면 ‘그냥 그래’였습니다.
여자친구 앞에서 말이 막혔다고 해서 마음까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질문을 들을 때마다 배가 뭉치고 혀가 굳었습니다. 첫 상담에서 그분이 물었습니다. “저는 원래 차가운 사람인가요?”
왜 마음은 있는데 말은 나오지 않았을까요? 상담 중 떠오른 장면에는 여자친구도 신혼집도 없었습니다. 마당에 엎어진 노란 비눗방울 통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름표 없는 양념통
몸에서 올라온 느낌을 알아차리고, 서운함인지 화인지 걱정인지 이름을 붙이는 일을 ‘정서 표지화’라고 합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은 감정을 알아차리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리킵니다. 그 양상은 사람마다 달라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름표가 떨어진 양념통 두 개를 떠올려 보세요. 소금과 설탕은 둘 다 하얗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어느 쪽이 소금이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하기 어렵겠지요. 그분에게는 서운함도 화도 걱정도 배가 뭉치는 느낌으로 찾아왔습니다. 기분을 묻는 말에 “속이 안 좋아”라고 답하곤 했던 장면과 겹칩니다.
누군가 기분을 물을 때 대답이 늘 “피곤해”, “속이 안 좋아” 같은 몸 상태로 돌아온다면, 그 순간 배나 목, 어깨가 어떻게 느껴지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느낌을 구분하고 말로 옮기는 일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냉장고 문에 붙인 감정 단어표
그분도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감정 단어표를 출력해 냉장고 문에 붙였습니다. ‘서운하다’, ‘섭섭하다’, ‘허전하다’의 뜻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기분을 묻는 말이 들리면 배부터 뭉쳤고, 단어표에서 읽은 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감정 단어를 익히거나 그날 기분을 적어 보는 연습은 자기 마음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기분이 오래 가라앉거나 불안이 이어진다면 전문가의 평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어를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배부터 뭉쳤습니다.
여자친구가 대답을 기다릴수록 배는 더 단단히 뭉쳤습니다. 빨리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지요. 그분은 마음을 먹기도 전에 나타나는 이 몸의 반응을 상담에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상담에서는 말이 막히기 직전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먼저 살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배가 단단해지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 느낌과 함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마당에 엎어진 비눗방울 통
깊은 최면에 들어간 뒤에도 그분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자친구가 울던 밤 배 속에서 무엇이 느껴졌는지만 천천히 물었습니다. 배꼽 위가 딱딱하게 뭉치고 혀가 뻣뻣해진다고 답하는 동안, 그분의 손바닥은 배 위를 둥글게 쓸고 있었습니다.
“비눗물 냄새가 나요. 손이 미끈미끈해요.”
대문 안쪽 좁은 마당에 남자아이가 서 있습니다. 아이 손에는 며칠 전 엄마가 문방구에서 사 준 노란 비눗방울 통이 들려 있습니다.
더 큰 방울을 불어 보려고 통을 높이 드는 순간, 발끝이 수돗가 턱에 걸립니다. 통이 시멘트 바닥에 엎어지고 비눗물이 바닥 틈으로 스며듭니다. 아이는 빈 통을 주워 들고 한참 서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는 울지 않습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부엌 입구에 서서 엄마를 올려다봅니다. 무를 썰던 엄마가 도마에서 손을 멈추고 돌아봅니다.
“왜, 어디 아파? 배고파? 졸려?” 엄마는 손등으로 아이 이마를 짚어 봅니다. “열은 없는데. 배 아파?”
아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끼던 비눗물이 쏟아져 속상하지만, 지금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말로 꺼내지 못합니다. 배가 뭉친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엄마는 아이를 안방 요 위에 눕히고 “엄마 손은 약손.” 하며 배를 둥글게 문질러 줍니다. 아이는 빈 통을 쥔 채 잠이 듭니다.
엎어진 비눗방울 통 이야기는 그날 아무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요에 누운 아이 곁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엄마가 아이 배를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가 꼭 쥔 빈 통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통 정말 아꼈지. 비눗물이 다 쏟아지고 나서 배 속이 꽉 뭉쳤지? 배가 아픈 것 같아도, 지금 네가 느끼는 건 속상함이야. 엄마 손은 따뜻하지? 엄마는 네가 아픈 줄 알고 배를 문질러 주는 거야.”
장면은 다시 아이가 비눗방울 통을 높이 들던 때로 되돌아갔습니다. 발끝은 또 수돗가 턱에 걸렸고, 비눗물은 전처럼 바닥 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아이는 울지 않은 채 부엌 입구에 섰고, 어디 아프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요 위에서 엄마 손이 배를 문지를 때, 아이는 속으로 그 말을 떠올렸습니다. ‘이건 속상한 거야.’ 뭉쳐 있던 배가 천천히 풀리고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아이는 아끼던 것을 쏟아 속상했지만, 엄마에게는 배가 아픈 것처럼 전했습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다정하게 배를 문질러 주었지요. 그분이 지금도 마음을 묻는 질문에 “속이 안 좋아”라고 답하는 모습은 이 장면과 닮아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그때 말하지 못한 속상함을 알아보았습니다.
최면 중에는 감정을 묻는 순간 몸의 불편함만 말하고, 속상함이나 서운함을 꺼내지 못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어른이 된 자신은 몸의 느낌을 따라가 그때의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그 감정을 말해도 된다는 이해로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부산 지사 제안을 들은 저녁
저녁 식탁에서 여자친구가 부산 지사 근무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한 해 동안 떨어져 지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잘됐네.” 늘 하던 대답이 먼저 나왔고 배도 뭉쳤습니다. 그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배에 손을 얹었습니다. 잠깐 답답함을 살핀 뒤 한마디를 보탰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좀 쓸쓸할 것 같아.”
여자친구는 식탁 너머로 그분의 손을 잡았습니다.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낼 한 해의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밤늦게까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서도 대답이 달라졌습니다. 신랑이 부모님께 절할 때 여자친구가 기분을 묻자 “보니까 뭉클하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전처럼 “배고팠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뭉치는 느낌은 지금도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럴 때면 잠깐 멈춰 쓸쓸함인지 서운함인지 걱정인지 살펴봅니다. 냉장고 문의 단어표도 그대로 있지만, 요즘은 표를 보기 전에 마음을 말할 때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첫 상담에서 그분은 “저는 원래 차가운 사람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적어도 이 사례에서 말문이 막히는 모습만으로 마음이 차갑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마음을 묻는 순간 배가 먼저 굳었고, 그 마음을 말로 가리키기는 어려웠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기분을 물을 때마다 “모르겠어”나 “피곤해”만 나오고 몸이 굳는다면,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닌지 걱정될 수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는 배의 답답함을 살피다가 오래전 말하지 못한 속상함을 떠올렸습니다. 이후에는 비슷한 느낌이 와도 지금 마음을 가리키는 말을 조금씩 꺼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