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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헤어졌는데, 마지막에 들은 말이 세 번 다 비슷했어요. ‘너는 좋은 사람인데, 네 속은 끝까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왼쪽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속이 쓰려서, 그런 날은 물만 마셨어요.”
세 번째 이별 뒤 상담을 신청한 그분은 대학 학과 사무실에서 교수들 일정을 챙기는 서른여섯 살 남성입니다. 연애할 때 상대가 입을 닫는 날이면 눈 밑 떨림과 속 쓰림이 먼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무엇이 서운했을까 짐작하며 밤늦게까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이유도 모른 채 먼저 사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걸까요.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만나고 나면 또 비슷한 사람이에요.”
반복되는 인간관계에 지친 분들은 흔히 자기 안목부터 의심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지난 관계를 하나씩 되짚어 보니, 닮은 것은 상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의 이별이 왜 비슷한 말로 끝났는지는, 최면상담 중에 어느 일요일 오전의 기억이 떠오르고 나서야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그대로였던 한 가지
그분이 만난 세 사람은 나이도 직업도 사는 동네도 달랐습니다. 공통점은 서운한 일이 생기면 말 대신 표정과 침묵으로 알린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곁에서 그분이 하는 일도 늘 같았습니다. 기분을 읽고, 이유를 짐작하고, 먼저 풀어 주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서로 껄끄러운 두 교수 사이에서 일정과 부탁을 옮기는 사람은 늘 그분이었습니다. 한쪽의 날 선 말을 부드럽게 바꿔 전한 뒤에는 양쪽의 표정을 한참 살폈다고 합니다.
비슷한 사람만 만나는 이유가 궁금할 때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 관계에서 내가 주로 맡았던 일도 되짚어 보면 단서가 보입니다. 상대는 달라도 늘 내가 맞춰 주는 쪽, 매달리는 쪽, 혹은 먼저 물러서는 쪽이었다면, 반복되는 것은 사람보다 나의 인간관계 패턴일 수 있습니다.
관계에도 길든 입맛이 있다
이런 관계의 반복을 이해하는 한 가지 틀로 ‘내적작동모델’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까운 보호자와 지내며 익힌 관계의 기준을 뜻합니다. 가까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곁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이 기준에 담깁니다. 이 기준은 누구에게 마음이 가는지, 상대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곁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지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음식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짜게 먹고 자란 사람은 싱거운 국을 뜨면 먼저 밍밍하다고 느낍니다. 짠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아도 손은 익숙한 맛 쪽으로 갑니다.
그분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사람의 기분을 읽어 풀어 주는 관계가 익숙한 맛이었습니다. 상대가 입을 닫으면 그 침묵이 곧 내가 얼른 풀어 줘야 한다는 신호로 들렸습니다.
“바로바로 말해 주는 사람이랑은 싸울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가까워진 느낌이 안 들었어요. 말없이 토라지는 사람 앞에서는 속이 쓰린데도, 이 사람한테는 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요.”
알면서도 먼저 나오는 “내가 미안해”
그분도 자기 패턴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이별 뒤에는 표현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자고 다짐했고, 관계 심리를 다룬 책도 여러 권 읽었습니다. 친구들은 너도 할 말은 좀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자기가 어떤 때 먼저 사과하는지 알아차리는 일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에서 본 대로 ‘기분 상한 일 있으면 말해 줘’라고 해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상대가 말없이 휴대전화만 보고 있으면, 입을 떼기도 전에 눈 밑부터 떨려요. 정신을 차려 보면 제 입에서는 ‘괜찮아, 내가 미안해’가 나와 있어요.”
다짐은 매번 사과가 나간 뒤에야 떠올랐습니다. 상대의 침묵을 알아차리는 순간, 눈 밑 떨림과 함께 내가 풀어야 한다는 익숙한 반응이 먼저 나왔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다짐보다 먼저 나타나는 그 반응을 살펴봅니다. 눈 밑이 떨리기 시작할 때의 감각을 실마리로 삼아, 그 긴장과 이어진 오래된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찾아봅니다.
부엌과 안방 사이, 일요일 오전
깊은 최면 속에서 왼쪽 눈 밑의 떨림에 한참 주의를 기울이던 그분이 일요일 오전의 집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이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제가 왔다 갔다 해요.” 엄마는 부엌에서 돌아선 채 무를 썰고, 아빠는 안방에서 신문을 넘깁니다. 전날 밤부터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면 속 아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야 겨우 다섯까지 세는 나이입니다. 이런 날이면 두 어른의 말은 늘 이 아이를 거쳐 오갔습니다. 안방에서 아빠가 아이를 불러 말합니다. “엄마한테 가서, 점심 먹고 외갓집에 갈 건지 물어봐.”
아이가 부엌으로 가서 묻자 엄마는 칼질을 멈추지 않은 채 말합니다.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해.” 아이는 안방으로 돌아가 아빠 앞에 섭니다. “엄마가, 아빠 하고 싶은 대로 하래요.”
아빠는 신문을 넘기며 그럼 안 간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아이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말합니다. “아빠가 오늘은 집에 있고 싶대요.” 그러고는 들고 다니던 고무공을 무릎에 올린 채 두 방 사이 복도에 앉습니다. 공은 굴리지 않고, 부엌 쪽과 안방 쪽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안방에서 신문 넘기는 소리가 끊기면 아이는 공을 쥔 손에 힘을 줍니다.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멈추면 숨을 참습니다. 두 소리가 다시 이어질 때까지 아이는 복도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늘 다투는 집으로 기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기억하는 부모님은 저녁이면 나란히 앉아 뉴스를 보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최면 속에서 아빠가 아이를 부르기 직전으로 돌아가, 고무공을 든 아이에게 지금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먼저 알려 주었습니다.
“어젯밤부터 엄마 아빠가 서로 화가 나 있어. 곧 아빠가 너를 부를 거야. 심부름은 다녀와도 괜찮아. 그래도 둘 사이를 푸는 건 엄마 아빠가 할 일이야. 다녀와서는 공 들고 앉아 있기만 하면 돼.”
곧 안방에서 아빠가 아이를 불렀고, 그 오전은 앞서와 똑같이 이어졌습니다. 엄마는 칼질을 멈추지 않았고, 아이는 엄마 말을 누그러뜨려 전한 뒤 복도에 앉았습니다. 이번에는 도마 소리가 끊겨도 그것이 엄마 아빠 사이의 일이라는 걸 아이가 알고 있었습니다. 공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고,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고 합니다.
그 일요일, 아이는 두 어른 사이에서 말을 전하고, 도마 소리가 멈추면 숨을 참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상대가 입을 닫으면 기분을 짐작하고 먼저 풀어 주려 했습니다. 그동안 자기 속마음은 말하지 못했고, 헤어질 때마다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최면 중에는 가까운 두 사람 사이의 기분을 읽고 말을 부드럽게 전하며 갈등을 풀어야 한다고 느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어른이 된 자신은 상대의 감정을 대신 책임지는 것이 자기 몫은 아니며, 자신의 마음과 필요를 먼저 말해도 된다는 이해로 그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두 교수에게 함께 보낸 메일
상담 뒤 있었던 일을 그분이 전해 주었습니다. 학과 사무실에서 두 교수가 회의 날짜를 두고 또 부딪쳤다고 합니다. 한 교수가 그분에게 저쪽에 날짜를 못 바꾼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이럴 때 말투를 다듬어 옮기고 양쪽 눈치를 살피느라 오후를 다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두 교수가 함께 받는 메일로 일정표를 보내고, 날짜는 두 분이 정해 주시면 그대로 반영하겠다고 한 줄 덧붙였습니다.
메일을 보낸 뒤에는 밀린 서류를 정리했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두 교수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오후 내내 눈 밑이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과의 저녁 약속에 삼십 분 늦은 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의자에 앉자마자 상대는 늦는다고 미리 말해 주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고 바로 말했습니다. 사과를 몇 번씩 되풀이하며 상대 얼굴만 살피던 예전과 달리, 그분은 다음부터 미리 알리겠다고 한 번 말했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그동안 삼켜 두었던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주말마다 상대 친구들 모임에 따라가는 게 사실은 버거웠다는 말이었습니다. 상대는 왜 이제야 말하느냐며 웃더니, 다음 모임은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속을 모르겠다는 말을 세 번 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버거웠던 일을 먼저 꺼냅니다. 비슷한 사람에게 비슷한 상처를 받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상대를 고르는 눈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관계가 삐걱이는 순간 내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을 떠올려 보세요. 그 행동이 마음먹기도 전에 매번 나온다면, 오래전 몸에 밴 무의식 자동반응에서 비롯됐을 수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는 그 익숙한 반응을 살핀 뒤, 버거웠던 일을 상대에게 먼저 말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