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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에서 돌아오자마자 불도 안 켜고 욕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어요. 남편이 문 앞에서 괜찮으냐고 묻는데, 대답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서른한 살 치과위생사 여성분의 이야기입니다. 조카 돌잔치가 열린 뷔페 홀에는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 아이 울음소리,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세 시간을 보내고 나오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귀가 먹먹했습니다. 차에 타고서야 내내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밥도 한 숟가락 넘기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런 저녁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주말에 모임이 하나만 있어도 다음 날 저녁까지 머리가 멍했습니다. 약속이 이틀 연달아 잡히면 하나는 핑계를 대고 빠졌습니다. 주변에서 예민하다고 하면 본인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HSP라는 말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 많은 곳에서 지치고 작은 소리에도 쉽게 피로해진다는 설명을 읽으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지만, 모임에서 돌아온 뒤의 저녁은 여전했습니다.
사람 많은 곳에 다녀온 뒤 혼자 있고 싶은 이유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만일까요? 조용한 집에서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면 무엇을 살펴봐야 할까요?
자극을 깊게 받아들이는 기질
HSP는 '매우 민감한 사람'(Highly Sensitive Person)의 약자입니다. 이런 민감한 기질을 감각처리 민감성이라고 부릅니다. 주변의 소리나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 같은 자극을 깊이 받아들이는 특성을 뜻하며, HSP 자체는 질병의 진단명이 아닙니다.
고화질로 설정한 카메라를 떠올려 보세요. 세세한 것까지 담는 만큼 한 번에 처리할 정보도 많습니다. 같은 모임에 있어도 소리와 분위기를 많이 알아차리는 사람에게는 혼자 쉬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모임 사이에 쉬는 날을 두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잠시 밖으로 나가거나 이어폰을 챙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분에게도 이런 방법은 소리로 인한 피로를 덜어 주었습니다.
혼자 있어도 끝나지 않던 모임
그분도 이어폰을 챙기고 약속 다음 날은 비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조용한 집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에서는 모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욕실에 앉아 떠올린 것은 소음이 아니었습니다. 건배할 때 시어머니의 표정이 굳어 보였던 것, 옆자리 사촌에게 인사를 너무 짧게 한 건 아닌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 동안 사람들 얼굴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시끄러운 곳을 떠난 뒤에도 긴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쉬며 기운이 돌아오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표정과 자신이 한 말을 계속 되짚는지 살펴보면 피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은 집에 돌아온 뒤에도 턱과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작은 표정을 잘 알아차리는 것과, 분위기를 놓칠까 봐 계속 살피는 것은 다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웃다가 말을 멈추는 순간까지 신경 썼고, 소리가 그친 뒤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모임에 가면 같은 긴장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세탁소 카운터 뒤의 낮은 의자
그분은 모임에서 피로해질 때마다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그 긴장을 느끼면서, 사람들 표정을 계속 살피게 된 경험과 당시의 마음을 돌아봤습니다.
깊은 최면에 들어가 어금니에 들어가는 힘을 한동안 느끼던 그분이 먼저 꺼낸 것은 소리였습니다. "딸랑 소리가 나요. 문에 달린 방울이요. 칙칙 하는 다리미 소리도 들려요."
어머니가 운영하던 동네 세탁소였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카운터 뒤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무릎 위에는 세탁물 전표 뒷면에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한 장 놓여 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엄마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방울이 딸랑 울리면 손님이 들어왔고, 곧이어 전화벨도 울렸습니다. 다리미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손님이 옷에 얼룩이 남았다며 언성을 높이자 엄마의 목소리가 딱딱해졌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쥔 채 어금니를 꼭 물고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말을 걸어도 될지 표정을 살피며 기다리는 동안에도 방울과 전화벨 소리는 이어졌습니다.
어른이 된 그분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무릎 위 그림을 함께 보며 가게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씩 짚어 주었습니다.
"엄마 목소리가 딱딱해진 건 옷에 남은 얼룩 때문이야. 너 때문이 아니야. 방울이 울리면 들어오는 손님도, 걸려 오는 전화도 엄마가 알아서 챙길 거야. 그림은 손님이 다 가고 나서 보여 줘도 괜찮아."
같은 오후를 다시 겪을 때도 방울은 울렸고 손님은 언성을 높였습니다. 엄마는 한참 동안 아이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그림을 쥔 채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엄마 얼굴에서 눈을 떼고 무릎 위 그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꽉 물었던 어금니에서 힘이 빠졌고, 가게 소리가 날 때마다 귀를 곤두세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림에 무엇을 그렸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가게의 아이와 지금의 그분에게는 소리와 분위기를 잘 알아차리는 면이 남아 있습니다. 세탁소에서 아이가 기다리며 엄마의 얼굴을 살폈듯, 돌잔치에서도 사람들 표정과 자신이 한 말을 계속 확인했습니다. 소리로 인한 피로에 이런 긴장이 더해져, 집에 돌아와서도 쉬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세탁소 장면을 다룬 뒤에는, 다른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긴장이 남아 있던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돌아봤습니다. 주변의 모든 반응을 자신이 먼저 읽고 버텨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해로, 그 경험들도 차근차근 소화해 나갔습니다.
피로연장 복도에서 숨을 고른 오 분
상담 뒤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피로연장은 돌잔치 때만큼 시끄러웠고, 이번에도 소리와 사람들의 표정을 잘 알아차렸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귀가 먹먹해지자 옆자리 친구에게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말하고 복도로 나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누가 서운해할까 봐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복도 창가에서 오 분쯤 숨을 고르고 돌아와 신부와 사진도 찍었습니다. 집에서는 욕실에 숨는 대신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았습니다. 남편에게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좀 피곤하다고 먼저 말했고, 그날 밤에는 사람들 표정을 되짚지 않고 잠들었다고 합니다. 비워 둔 이튿날 일요일에는 남편과 동네 빵집까지 걸어가 아침을 먹었습니다.
사람 많은 곳에 다녀온 뒤 조용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민감한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 있었던 대화를 밤늦도록 되짚는다면 소음과 별개로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표정을 놓칠까 봐 긴장하던 마음을 상담에서 다뤘습니다. 민감한 기질은 그대로였지만, 결혼식에서는 피로를 느낀 순간 쉬겠다고 말했고 집에 와서도 모임을 되짚지 않고 잠들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