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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메일을 보냈다고요? 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는 스물아홉 살 남성분이 공모전 마감 전날 팀장에게 한 말입니다. 그날 오후, 팀장이 도면의 치수를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옆자리 선배는 수정본을 달라고 불렀고, 책상 위 전화와 메신저 알림도 연달아 울렸습니다.
귀가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해지더니 사람들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어졌습니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자기 손도 남의 손 같았고, 모니터의 도면은 두꺼운 유리 너머에 있는 듯 보였습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사십 분쯤 지나 있었습니다. 그사이 거래처에 메일을 보내고 팀장의 질문에도 대답했다는데, 그 시간이 통째로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이삿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질문했을 때와 친구 결혼식 사회 중 마이크가 끊겼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리와 몸이 멀어지는 순간
해리는 평소 함께 이어지는 기억과 몸의 감각, 내가 나라는 느낌과 주변의 현실감이 따로 떨어진 듯 느껴지는 현상입니다. 피곤해서 잠시 멍한 것과 달리, 스트레스가 몰릴 때마다 소리와 몸이 멀어지고 그사이의 기억이 비어 일상에 지장을 준다면 전문적인 평가를 통해 다른 원인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여러 요구가 한꺼번에 몰리는 순간이 반복되는 자극이었습니다.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정신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의 손과 주변이 낯설어진 뒤였습니다.
메모를 해도 막지 못한 반응
그분은 마감 날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고, 귀가 먹먹해지면 찬물로 세수했습니다. 휴대전화에는 한 일을 시간별로 적었습니다. 메모를 보면 나중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자극이 몰리는 순간 자신이 멀어지는 반응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충분히 깊은 최면상태에 들어간 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부를 때 밀려오는 벅참과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에 집중했습니다. 그 감정과 감각을 따라가자, 사람과 소리가 가득한 어린 시절의 연회장이 연결되어 나타났습니다.
사람과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오던 잔치
“잔치예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엄마 품에 안겨 다니던 무렵의 아이가 식당 연회장에 있었습니다. 마이크와 박수 소리가 번갈아 울렸고, 낯선 어른들이 다가와 볼을 만지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이를 안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아이는 울먹이다가 곧 울음을 멈췄습니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엄마 품으로 돌아오자 어깨에 뺨을 댄 채 손발의 힘을 뺐습니다. 눈은 떠 있었지만 주변을 보지 않는 듯했고, 시끄러운 소리는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작아졌습니다. 너무 많은 소리와 손길을 줄일 방법이 없던 아이에게는 반응을 끊고 멀어지는 것이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요구가 한꺼번에 몰리면 같은 형태의 반응이 먼저 나타났습니다. 연회장에서는 낯선 소리와 손길 속에서 대답을 멈추고 주변을 멀리했고, 사무실에서는 팀장의 질문과 전화, 메신저가 겹치자 소리와 자신의 손이 멀어진 뒤 그 시간의 기억이 흐려졌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아이 곁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안아 가고 소리도 너무 커서 벅찼구나. 그때는 싫다고 말하거나 한 사람씩 오라고 할 수 없어서, 힘을 빼고 주변을 멀리하며 버텼구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러 요구가 한꺼번에 오면 잠시 멈추고 무엇부터 할지 정해 달라고 말할 수 있어.”
같은 잔치를 다시 지나갈 때도 어른들은 아이를 번갈아 안았고 마이크 소리도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엄마 품으로 돌아온 아이는 등을 감싼 팔을 느꼈고, 소리가 크더라도 주변을 끊어 내야만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얕던 숨도 한 번 길게 빠져나왔습니다.
최면 중에는 자극과 요구가 몰리면 반응을 끊고 멀어진 채 견뎌야 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 다뤘습니다. 현재의 자신은 벅찬 순간을 알아차리고 요구를 줄이거나 순서를 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선택으로 그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어느 것부터 할지 정해 주시겠어요?”
상담 뒤 다시 맞은 공모전 마감 날에도 팀장의 질문과 선배의 호출, 전화벨이 한꺼번에 몰렸습니다.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소리와 자신이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그 반응을 알아차렸습니다.
“두 가지가 한꺼번에 와서 헷갈립니다. 어느 것부터 할지 정해 주시겠어요?”
팀장이 순서를 정해 주자 그분은 일을 하나씩 처리했습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그날 보낸 메일 세 통의 제목까지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고개만 끄덕인 채 자신을 멀리하며 버텼지만, 이제는 벅찬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줄이고 순서를 요청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