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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제가 웃고 있어요. 옆에 있는 친구가 누군지도 알아요. 그런데 그날 거기 간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사진을 넘길수록 귀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지고,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춰 버려요."
세무사무소에서 일하는 마흔 살 여성분이 첫 상담에서 한 말입니다.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서른 즈음의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찍은 사진이 이백 장 넘게 남아 있었습니다. 달력에는 약속이 빼곡했고 회사 서류에도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는 통째로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기억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챈 곳은 동창 모임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너 그해 겨울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갔잖아" 하며 웃었습니다. 그분도 따라 웃었지만 아무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친구들 목소리가 멀어졌습니다. 이후 나눈 이야기도 흐릿하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그분은 기억 공백, 충격 후 기억상실 같은 말을 검색창에 넣어 보았습니다. 다음 동창 모임부터는 두 번 연달아 핑계를 대고 빠졌습니다. 그 시기 이야기가 또 나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억 공백과 관련된 검사를 받았지만 뚜렷한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억이 비어 있는 시기뿐 아니라, 그 시기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이후 대화까지 흐려지는 반응이 왜 반복되는지 알고 싶어 상담을 찾았습니다.
열람이 막힌 책처럼
해리는 강한 스트레스 등을 겪을 때 기억이나 감각, 나 자신에 대한 느낌이 평소처럼 이어지지 않는 현상입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에서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기억 중 일부에 접근하기 어려워져 공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억이 사라졌다기보다 떠올리기 어려운 상태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도서관 검색대에는 책 제목이 뜨는데 막상 책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검색 버튼을 여러 번 눌러도 책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분도 밤마다 옛 메시지와 사진을 뒤졌지만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가 먹먹해지고 잠드는 시간만 늦어졌다고 합니다.
그분에게는 비어 있는 기억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진이나 이야기가 그 시기를 건드리면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으며, 몸이 굳은 뒤에는 방금 나눈 대화까지 흐려졌습니다. 기억 공백을 마주할 때마다 같은 해리 반응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기억과 감각이 함께 멀어질 때
그분은 어제 한 일이나 지난달 약속은 기억했지만, 서른 즈음의 몇 달은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더 눈에 띈 것은 그 시기 이야기가 나오면 지금 듣고 있는 목소리까지 멀어지고 몸이 멈춘다는 점이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에 접근하기 어려운 순간과 현재의 감각이 끊기는 순간에 같은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깊은 최면상태에서 원인 경험으로
충분히 깊은 최면상태에 들어간 뒤, 그 시기 이야기를 들을 때 먼저 올라오는 두려움과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 손가락이 멈추는 답답함에 집중했습니다. 현재의 감정과 신체감각을 따라가자, 같은 방식으로 소리와 몸을 멀리하며 버텼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연결되어 나타났습니다.
귀가 먹먹해지고 손이 멈추는 반응은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시작됐습니다. 상담에서는 기억과 감각을 멀리해야 했던 처음의 경험에 접근해, 당시 아이가 무엇을 두려워했고 왜 반응을 끊으며 버텼는지 살폈습니다. 이어 어른이 된 자신이 그때의 상황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고, 지금은 몸과 기억을 멀리하지 않고도 감당할 수 있다는 선택으로 바꿔 갔습니다.
불이 꺼진 저녁
깊은 최면상태에서 그분은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과 몸이 멈추는 답답함에 집중했습니다. 잠시 뒤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캄캄해요. 훨씬 어릴 때예요."
아직 계단을 두 발 모아 한 칸씩 오르내리던 무렵의 저녁입니다. 텔레비전 소리와 형광등 불빛이 한꺼번에 뚝 끊깁니다. 어른들이 "손전등 어디 뒀어?", "두꺼비집 좀 봐" 하며 서랍을 열고 닫습니다. 발소리가 방과 부엌을 바쁘게 오갑니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카디건 자락을 두 손으로 붙잡습니다. 엄마가 "괜찮아? 무서워?" 하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숨을 참은 채 꼼짝하지 않고, 서랍 소리도 발소리도 멀리서 나는 것처럼 작아집니다.
갑자기 어두워지고 어른들의 발소리가 분주해지자,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숨을 멈추고 주변의 소리와 몸의 감각을 멀리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에는 반응을 끊고 가만히 있어야 버틸 수 있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른이 된 그분은 최면 속에서 카디건을 붙잡은 어린 자신 옆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갑자기 캄캄해지고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여 얼마나 무서웠는지 먼저 알아준 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전기가 잠깐 나간 거야. 엄마와 어른들은 불을 밝히려고 손전등을 찾고 있어. 불은 다시 들어와. 모르는 소리가 나도 숨을 멈추고 소리를 멀리하지 않아도 돼. 무섭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그 말을 전한 뒤 같은 저녁을 다시 겪었습니다. 불은 똑같이 꺼졌고 어른들은 여전히 서랍을 뒤졌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갑자기 어두워진 것이 큰일이 벌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어른들이 불을 밝힐 방법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숨이 멎지 않았고, 서랍 여는 소리도 손전등을 찾는 소리로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손전등이 켜질 때까지 아이는 카디건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이는 갑작스러운 어둠 앞에서 숨을 멈추고 소리와 몸의 감각을 멀리하며 버텼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을 마주하면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으며, 그 순간의 대화까지 흐릿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몸과 감각을 끊어 버티던 반응이 기억 공백을 건드리는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최면 중에는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소리와 몸을 멀리하며 버텨야 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현재의 자신이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상황과 맥락을 알려 주고, 이제는 감정과 감각을 끊지 않고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다는 이해로 그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그 무렵은 내가 기억이 잘 안 나"
그분은 두 번 빠졌던 동창 모임에 다시 나갔다고 합니다. 누군가 그해 겨울 이야기를 꺼내자 귀가 살짝 먹먹해졌지만, 이번에는 먼저 말했습니다. "그 무렵은 내가 기억이 잘 안 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친구가 그해 겨울 이야기를 이어 가는 동안에도 목소리가 멀어지거나 몸이 굳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앉아 함께 웃다가 막차 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밤마다 옛 메시지를 뒤지는 일도 멈췄고, 그 시기의 사진을 열어 볼 때도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기억이 비어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진과 사람을 함께 피했지만, 이제는 그 시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현재의 대화와 몸의 감각을 놓치지 않고 자리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비어 있는 기억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기억을 건드리는 말과 사진 앞에서 다시 소리와 몸을 멀리하고 사람을 피하게 되면 일상도 함께 좁아집니다. 체인지 심리최면상담센터에서는 깊은 최면상태에서 현재의 기억 공백과 연결된 감정과 신체감각을 따라 원인 경험에 접근하고, 그때 형성된 무의식 자동반응을 현재의 이해와 선택으로 바꾸도록 돕습니다.










